신현애

수필가·공인중개사

아침이면 산새들의 지저귐이 잠을 깨웠다. 신록이 물들어 가는 이맘때쯤 병풍처럼 펼쳐진 우암산자락이 쪽물을 들이듯 하루가 다르게 짙어갔다. 3월 신학기에 앞서 교육 공무원인 남편의 인사이동 발표가 있었다. 언제나 이웃과 정이 들만하면 또 다른 근무지를 따라 집을 옮겨야 했는데, 그해 봄, '시내 발령'과 '집을 사러 다닌다'라는 두 가지 일이 내게 일어났다. 결혼 7년 만에 장만한 집, 시내를 벗어나기 직전 북쪽 내덕동의 변두리 깊숙하게 틀어 박혀있던 안덕벌이다. 기쁨은 하늘을 날 듯했지만, 돈에 맞추다 보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었는데, 오른쪽 동네는 낡고 허름한 집이 많았고 왼쪽으로는 논과 밭이 황량한 벌판이었다.

집은 국민 주택 규모이었지만 유명한 건축가가 자신의 집을 짓고 남은 터에 지은 집이라 쓸모 가 있고 예뻤다. 급격한 생활의 변화는 방 한 칸을 세를 놓은 집주인이 되었다는 점과 화장실이 실내·외에 두 개 있다는 것이었다. 실내에 있는 좌변기는 문화생활의 시작이었고, 대문 옆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은 주객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생리위생 공간이었다. 계단 아래 수돗가에는 김칫독을 묻었고 장독 주변에는 자디잔 돌을 깔아 놓았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한가지 생각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집 전체를 들어 올려 아기 목욕시키듯이 구석구석 깨끗이 씻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날 이후 세 번의 집을 옮겨 살았지만, 자나 깨나 집에 대한 애틋한 정이 그토록 가슴 벅찼던 적은 없었다. 집은 작아도 슬래브 지붕으로 옥상이 있었는데 그 쓰임새가 다양했다. 양쪽 난간에 철 기둥을 세워 빨랫줄을 매었고, 항아리를 좋아하는 나는 크고 작은 장독에 엉성한 솜씨로 된장과 고추장을 담았다. 일찍 퇴근한 남편과 서산에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고, 앞집 할머니는 고추를 말려가기도 했다. 문간방 어린 아들이 또래 친구들과 노는 놀이터가 되었으며, 가끔은 그 아이 엄마가 술에 취한 남편을 피해 이웃집으로 피신해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 후 몇 번 집을 옮기고 그때마다 더 높고 넓은 옥상이 있었지만, 첫 집에서처럼 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시절이 나의 일생에서 가장 한가롭고 여유롭게 보낸 날 들이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아내로 주부로 시장을 보고 살림하며 동네 아줌마들과 하릴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후에는 라디오를 즐겨 들었는데, 청취자가 보낸 소소한 일상의 사연을 읽어주고 간간이 음악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진행자의 잔잔한 목소리는 나른한 오후 시간에 활력을 주었다. 당시 들었던 말 중에서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설거지를 할 일이 있어도 한 소절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라는 …. 언제나 삶에 여유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지만, 살림 솜씨가 어설픈 내게 그 말은 금쪽같은 말이었다. 스펀지처럼 흡수한 말을 지금까지도 충실하게 지켜가고 있다.

창밖에서 청량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하루 종일 창을 열어놓아도 먼지가 없다. 앞산, 국사봉이 푸르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니 처음 집을 사고 가슴 설렜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 집에서 나는 새로운 나의 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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