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웃픈 세계 신기록

2024.06.27 14:27:59

신한서

전 옥천군 친환경 농축산과장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막을 내렸다. 소낙비가 한바탕 지나간 느낌이다. 투표 당일은 가족들과 멀지 않은 곳으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사전투표 첫날 아내와 가까운 투표장으로 갔다. 투표용지 2장을 받아 들었다. 우선 51.7㎝ 나 되는 파란색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어리둥절하게 한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당 이름과 많은 숫자에 가위가 눌린다. 기호 40번까지 이어진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1, 2번은 없고 3번부터 시작한다. 국회의원이 없는 원외 정당은 10번부터 'ㄱ' 자로 시작하여 19번까지 이어진다. '가가국민 참여당'에서 '기후 민생당'까지 이어진다. 반대로 끝부분은 'ㅎ' 자로 시작하는 39번에 '홍익당', 40번은 '히시태그 국민정책당.'이란 발음도 잘되지 않는 정당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제라는 괴물이 무려 38개 정당에 자리를 깔아줬다. 원외 정당은 당명의 가나다순에 따라 투표용지에 순서가 정해진다. 당명에 '가'와 '하'를 넣어 맨 위 나 아래를 차지하려는 작명 경쟁이 벌어졌다. 51.7 ㎝나 되는 투표용지 순번을 두고 '가가호호', '히시태그'와 같은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투표용지 올림픽경기가 있다면 무조건 금메달감이다. 기네스북에도 어렵지 않게 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국민의 쏟아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꼼수 위성정당을 결정한 국회의원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특히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갖고 있는 야당 의원님의 업적이 결정적이다. 투표용지가 너무 길어 분류기를 쓰지 못하고 수 개표가 불가피하여 부정투표 논란을 해소하는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 확실하다. 이쯤 되면 비례대표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지역구 254명을 제외한 46명의 비례대표 의석 배분율이 엉터리다. 정당 지지율에 따라 단순 배분하면 되는 것을 지역구 의석과 연동하여 나눠 갖는다. 지역구 의석이 많을수록 비례 의원이 적어지는 선거법 때문에 기호 1.2번은 없고 3번부터 시작하는 웃픈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국회의원 수가 국민의 지지와 다르게 결정된다는 것은 선거와 참정권의 근간을 흔드는 커다란 문제다.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 일반 국민은 몰라도 된다며 180석을 가진 야당이 만들어 낸 걸 작품이다. 국민의 표(票)를 멋대로 주무르며 비례대표를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사전투표제도 문제다. 정작 투표일에는 정해진 투표소에서 긴 줄을 서며 투표하는데, 사전투표는 전국 아무 곳에서나 투표한다. 그것도 이틀이나 된다. 투표는 엉뚱한 날에 미리 하고, 정작 투표하는 날은 놀러 가는 빨간 날로 전락하고 말았다. 덕분에 필자도 투표 당일 가족 여행 계획을 잡을 수가 있었다. 사전투표일을 하루로 줄이거나, 차라리 투표일을 공휴일에서 빼는 것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 사전 투표장에서는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그냥 기표소에 두고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역구만 투표하고 비례대표 투표용지는 너무 길고, 정당도 많아 당황한 나머지 그냥 두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킬러 문항을 받아 든 수험생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별다른 생각 없이 투표용지를 받아 들고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하물며 어르신들은 얼마나 당황할까, 이해가 된다. 오죽하면 기표도 하지 못하고 51.7㎝나 되는 비례투표 용지를 그냥 기표소에 두고 나왔을까. 필자가 잘 아는 어르신 한 분도 비례대표는 누가 누군지 도대체 알 길이 없어, 그냥 맨 위에 찍고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비례대표 무효가 무려 131만 표나 나왔다고 밝혔다. 총 투표자 수 대비 4.4%나 차지하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준석이 대표로 있는 개혁신당이 얻은 표보다 많은 숫자다. 51.7㎝나 되는 어린아이 키만 한 투표용지가 국민을 웃프게 만든다. 삶은 소 대가리가 하늘 보고 웃을 일(仰天大笑)이다. 투표용지 세계 신기록 달성에 큰 공을 세운 의원님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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