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에게 옥새를 바치다, 한명회 큰조부

2010.07.18 18:11:17

조혁연 대기자

한명회의 할아버지 상질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다. 상경이 형이 되고, 상덕이 동생이 된다. 한명회의 부모는 물론 할아버지 상질도 일찍 돌아갔다. 따라서 한명회는 작은할아버지 상덕에 의해 길러졌다. 한상덕은 태종이 눈치를 볼 만큼 매우 깐깐한 관료였다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한명회의 큰할아버지인 상경은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청주한씨 문중으로부터는 한명회 이상의 추앙을 받고 있다. 명나라로부터 국호 '조선'을 갖고 돌아온 인물은 한상질이다. 그의 친형인 상경도 여말선초에 큰 몫을 했다.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아 이를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인물이 바로 한상경(韓尙敬·1360~1423)이다.

한상경은 실물경제에도 밝은 면이 있었다. 저화(楮貨)의 지질을 통일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저화는조선초 지폐로, 태종이 즉위한 1401년 사섬서(司贍署)라는 관청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역별로 지질이 달라 문제가 됐다.

'호조판서 한상경이 저화를 만드는 법을 아뢰었다. 계문(啓文)은 이러하였다. "저화의 종이가 각도에서 오므로 두텁고 얇고 정하고 추한 것이 같지 않은데 시정(市井) 사람들이 다만 두터운 종이를 쓰는 것을 좋아할 줄만 아니, 원컨대, 서울 안의 한 곳에서 만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실록>

한상경은 태종 즉위 초에 "임금은 임금노릇 하기가 어려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태종은 이 말을 두고두고 가슴 속에 새겼던 모양이다. 술자리에서 한상경을 우연찮게 만나자 또 그 얘기를 꺼낸다.

'상경이 술잔을 들어 올리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처음에 경이 나에게, '임금은 임금노릇 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아야 하며, 아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했는데, 내가 지금도 잊지 않았다"라고 하니, 상경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이미 신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고 하니, 다시 한 말씀을 아뢰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무슨 말인가"라고 하매, 대답하기를, "시초는 없지 않으나, 종말이 있기는 적습니다"라고 하니, 또 칭찬하였다'.-<태종실록>

시작보다 끝이 중요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상경은 효심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이 이를 이례적으로 길게 다루고 있다. '졸기'는 어떤 관료가 죽을 경우, 사관이 그의 생전 일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진정한 효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한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이미 장례를 마치고 나매, 병이 더욱 심해졌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병이 있은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다만 먼저 죽어서 늙은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자식의 일을 다 마쳤으니, 죽더라도 또한 유감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가문을 따지고 족보를 논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사용한다. 이는 신라, 고려, 조선 등 삼조(三朝)에 걸쳐, 고위 관료를 많이 배출한 가문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왕족인 전주이씨와 함께 청주한씨를 꼽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 중심의 뿌리에 옥새를 태조에게 바친 한상경, 국호 '조선'

을 가져온 한상질 그리고 조선 최고의 책사였던 한명회 등이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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