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복위 때 순절하다, 영동 박연 아들

2010.07.27 18:17:07

조혁연 대기자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는 고구려 왕산악, 신라 우륵, 조선시대 박연 등이 꼽힌다. 이중 박연(朴堧·1378~1458)은 영동에서 생과 몰을 함께 했다. 세종대에 활약한 박연은 악보 편찬, 악기 제작 등 한국 음악사에서 다방면의 공헌을 남겼다. 그는 대금을 잘 부는 등 그 스스로 빼어난 연주가이기도 했다.

박연은 3남 4녀를 뒀다. 이중 맏아들 맹우(孟愚)는 현령, 둘째아들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다. 3남인 계우(季愚)는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학사에 역임되는 등 장래가 가장 촉망됐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로는 소과와 대과(문과)가 존재했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것이 소과이고, 여기서 합격한 사람에게는만 대과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박계우는 수양대군 세조가 왕권 찬탈을 도모하는 시기에 순절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종사(宗社)의 대계를 위하여 사(私)를 버리고 마지못해 대신과 대간의 청을 따르니, 부처(付處)한 이용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 이징옥의 아들 이성동, (...) 그리고 정분·이석정·조완규·조순생·정효강·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 이제부터 간당의 근본이 영원히 근절되었으니, 만약 또 다시 역당(逆黨)의 옛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 마땅히 용서하지 않겠다. 이것을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단종실록>

박계우가 순절함에 따라 그의 부인 고성이씨도 연좌제에 의해 천민으로 강등, 홍윤성(洪允成·1425∼1475) 가문에 노비로 지급됐다. 이후 성종대에는 다시 권준 가문으로 팔려갔다. 곧 다루겠지만 홍윤성은 우리고장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고, 권준은 권근의 아들이다. 연좌제는 아버지 박연에게도 적용됐다. 관례대로라면 박연도 극형에 처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 임금을 모셨고 또 음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그를 참작했다.

'봉교(奉敎)하기를, "박계우의 아비 박연(朴堧)은 자원에 따라 외방(外方)에 안치하고, 정원석의 아우 정막금(鄭莫今)은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원방(遠方)에 안치하고, 그 어미와 출가하지 않은 누이는 논(論)하지 말라" 하였다'.- <단종실록> 본문 중 '자원에 따른 외방 안치'는 지방의 원하는 곳으로 귀양가는 것을 말한다. 사실상 귀양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봉교는 임금의 말을 받드는 것을 의미한다.

정조대에 이르러 단종복위운동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식이 마련됐다. 이때 264인이 이른바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려졌다. 그 기록에 박계우의 이름도 올라 있어, 그가 단종복위와 관련해 순절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당시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사료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정조는 그의 벼슬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장릉의 일로 인해 생각해보니, 고 충신 박계우는 바로 대제학 박연(朴堧)의 아들인데, 연이 악(樂)을 제작한 것은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예를 제작한 공과 백중을 이루는 것이다. 문경공의 아들 허후는 계우와 동시에 순절했으나 후는 시호가 있고 계우만 유독 빠졌으니, 혹시 벼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랬는지 모르겠다"하였다'.-<정조실록> 그의 위패는 영동 화암서원에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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