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돌로 한국식 편경을 만들다, 영동 박연

2010.08.08 18:19:20

조혁연 대기자

박연(朴堧·1378~1458)은 문과에 급제한 히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돼 악기 발명·개선, 악보편찬·수정 등 음악과 관련된 일을 전담적으로 처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추앙되고 있다.

박연은 음악에 관한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피리를 잘 불어 '선수' 소리를 들었다. 성현(成俔·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에 '공은 영동(永同)의 유생(儒生)으로 젊었을 때 우연히 피리를 익혔는데,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선수(善手)라 일컬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박연은 음악적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도 치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뒤 서울에 왔을 때 어떤 광대가 보고서 웃기를, "음절이 야비하여 가락에 맞지 않는데, 이미 습관이 되어 고치기도 어렵겠다" 하니, 공이 굳이 배우기를 청하였다. 며칠만에 광대가 말하기를, "선배님은 가르칠 만합니다" 하였다.또 며칠 지나서 말하기를, "규범(規範)이 이미 이룩되었습니다" 하고, 또 며칠 지나자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나로서는 미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 급제한 뒤에 또 거문고와 비파 등 모든 악기를 연습하여 정묘하지 않음이 없었다'.-<용재총화>

세종 7년(1425) 경기도 남양에서 옥돌의 일종인 '경석'(磬石)이 발견됐다. 하찮은 돌 같이 보이는 이 경석은 한국 음악사에 기념비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이전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질그릇의 재료로 쓰이는 '질'로 편경(編磬)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질로 만든 편경은 더위와 추위 그리고 건습(乾濕)의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았다. 이 경우 음의 높낮이 기준이 자주 변하게 된다.

이를 해결한 것이 경석이었다. 경석은 가공이 쉬운 돌이기 때문에 한서건습(寒暑乾濕)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따라서 박연이 만든 옥돌 편경은 이후부터 조선시대의 기준음 역할을 하게 된다. 세종도 박연만큼이나 음악적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편경을 처음 시연하는 날 세종이 음정이 틀린 것을 정확히 지적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磨

] 아니한 것입니다" 하고, 물러가서 이를 갈아 먹이 다 없어지자 소리가 곧 바르게 되었다'.

박연(朴堧·1378~1458)의 호는 난계(蘭溪)이다. 충북 영동 그의 집에 난계가 많이 자랐던 모양이다.그는 삼남 맹우가 계유정난에 관련되면서 낙향하게 된다. 악성답게 박연은 낙향할 때도 손에 피리를 잡았다.

'공의 아들이 계유년 사변에 관계되었으므로 그 역시 이로 인하여 파면되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친구들이 강가에 나가서 전송할 때, 그는 말 한 필과 종 하나를 데리고 나와 행장이 초라하였다. 친구들이 함께 배 가운데에 앉아서 술잔을 베풀다가 손을 잡고 하직할 때 그가 주머니에서 피리를 뽑아 세 곡조를 분 뒤에 떠나니, 그 소리를 듣고 처량하게 느껴 눈물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용재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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