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임종을 두번 지키다, 청주 한계희

2010.08.19 19:07:02

조혁연 대기자

당나라 3대 서예가의 한 명으로 우세남(虞世南·558~638)이라는 인물이 있다. 특히 그는 해서체를 잘 썼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격과 박식함을 겸비했다. 따라서 당시 당태종은 우세남에 대해 덕행, 충직, 박학, 문사(文詞), 서한 등 5절(五絶)을 갖췄다는 인물평을 했다.

조선시대에도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을 닮았다고 해서 '세남비서'(世南秘書)라고 불려진 인물이 있다. 한계희(韓繼禧·1423~1482)다. 이때의 비서는 상사를 모시는 직이 아닌, 국가에서 가장 아끼는 책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 한계희가 당시 사류(士類) 사이에서 얼마나 박식하게 비춰졌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계희가 졸하자 당시 사관이 이례적으로 장문의 호평을 하고 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계희는 천품이 검소하고 간결하며, 분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온 집안이 초라했으며, 좌우에는 도서뿐이었다. 소시(少時)에 집현전에 뽑혀 들어갔을 적에도 동료들이 매우 경외하여, 온 좌중이 웃으며 농지거리를 한창 하다가도 공(公)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면, 곧 조용히 하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성종실록>

본문 중에 '온 집안이 초라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청주한씨는 가장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게다가 한계희는 당시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즐기기 보다는 오히려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한 자선사업가에 가까웠다.

'공은 상당 명회(明澮)의 재종형으로써 여러 대의 명망과 부귀가 혁혁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개결한 지조가 있어서 봉록의 수입으로 종족 중에 외로운 자와 홀어미된 이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가세가 가난하여 조석을 거친 음식으로 때웠으며 늙어서 더욱 가난이 심했다. 형 계미가 민망히 여겨 때로 구휼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세조는 한계희의 박식·청렴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총애를 넘어서 생의 마지막 시간에도 한계희를 부른다.

'무자년에 세조의 병이 위급하자, 급히 불러 침실에 들어가니, 이때 예종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세조가 한계희를 시켜 예종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내가 평일에 글을 지어서 조훈조장(祖訓條章)과 같이 너에게 내려 주려고 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할 수가 없으니, 그 대강만 간략히 말하겠다. 첫째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섬길 것(敬天事神)이며, 둘째 선조를 받들고 효도하기를 생각할 것(奉先思孝)이며, 세째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節用愛民)이니, 나의 말은 이것뿐이다."'-<성종실록>

본문 중 조훈조장은 조상이 남긴유훈 정도를 의미하고 있다. 실록은 세조가 이 유언 후 국새와 면류관을 예종에게 넘기도 이튿날 승하한 것으로 적고 있다. 한계희의 주군 임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예종이 재위 14개월만에 갑자기 드러누웠다. 한계희는 이때도 주군을 부름을 받는다.

'임금이 불예(不豫)하니, 여명(黎明)에 서평군(西平君) 한계희·좌참찬 임원준(任元濬) 등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예종실록> 본문 중 '불예'는 임금이나 왕비 등이 본문 중 '불예'는 임금이나 왕비 등이 편찮거나 죽음에 임박한 것을 말한다. 한명회와 육촌인 것에서 보듯 계희는 청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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