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담중인 처자를 빼앗다, 한명회 조카

2010.08.22 18:21:02

조혁연 대기자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죽자 그의 장지가 관향(貫鄕) 청주목(지금의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로 결정됐다. 한양~청주목은 운구 기간이 족히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다. 거리가 너무 멀자 운구를 맡기로 했던 군인 중 일부가 줄행랑을 쳤던 모양이다.

'좌승지 한언(韓偃)이 아뢰기를, "신의 숙부 한명회를 오늘 발인하는데, 영번군(迎番軍)은 성문을 나서자마자 모두 도망하였고, 양주(楊州)의 군인은 겨우 15명이어서 떠날 수가 없어 성문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니…'.-<성종실록>

본문에 한언(1448~1492)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한명회와 삼촌-조카 사이다. 그러나 실록에는 둘 사이(한명회가 큰 아버지뻘)가 그 이상으로 가까웠음을 의미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 때는 한명회의 세력이 불길 같은 때였는데 봉례(奉禮) 박인경(朴仁敬)은 노비가 많았으며 단지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 종친과 더불어 혼담이 있다가 끝내는 사인(士人) 손윤복(孫胤僕)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자 한명회가 종친을 사주하여 소장을 내서 이혼하게 하고 한언으로 하여금 취처(娶妻)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실록의 기록대로라면 삼촌이 조카 장가드는것을 적극적으로 도와줬고, 그것도 혼담이 오가던 처자를 빼앗은 것이 된다. 언뜻 보아도 정상은 아니다. 조선시대 이혼은 크게 의절(義絶), 역가(逆家), 휴기(休棄), 출처(出妻) 등 4가지가 존재했다. 의절은 남편이 부인의 가족을 구타하거나 간통하는 경우, 역가는 부부중 어느 한쪽의 가족이 역모에 관련되는 경우로, 국가가 강제로 이혼하게 했다.

반면 휴기와 출처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거나 내쫓는 경우로, 칠거지악이 성립할 때에만 가능했다. 그러나 다음 경우는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내쫓지 못했다. 조강지처와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른 아내 그리고 늙고 의탁할 곳이 없는 여자는 비록 칠거지악에 해당돼도 내쫓지 못했다.

한명회가 '종친을 사주하여 한 여성을 이혼케 한 경우'는 어느 대목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당시 사류(士類) 사이에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한언의 아들 홍윤(韓弘潤·1464~1522)이 부친이 돌아간 후 상소를 올린다.

'사람이 9세에 어찌 성혼할 리가 있으며, 본래 혼인하지 않았는데 또한 어찌 이이(離異)할 일이 있으리까! 그 후에 어미는 13세에 비로소 신의 아비에게 시집 왔고, 신의 아비 한언은 성종조에서 요직을 지냈었는데, (…) 신의 아비가 있을 때에는 한 마디의 말도 없다가 신의 아비가 죽은 지 10여 년 뒤에 이런 말이 있을 수 있으리까!'-<중종실록>

본문중 '이이'는 이혼을 뜻한다. 당시 사관은 이 사건에 대해 끝끝내 양보하지 않는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 홍윤(弘潤)이 형조의 낭관이 되어 대간의 논박을 받고 체직당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변명(辨明)되지 않았다' 하였다'.-<중종실록>

정황상 당시 사관은 한언보다는 한명회에게 감정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언의 묘는 경기도 부천에 소재하고 있으나 실록은 '청주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흔치않게 그곳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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