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평에 箕子 사당이 있는 까닭

2010.08.26 18:02:38

조혁연 대기자

고조선을 논할 때 약방의 감초격으로 등장하는 것이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말 그대로 고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로 건너와 조선땅의 지배자가 됐다는 설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에 이어 기원전 1100년경 기자에 의해 건국됐고, 기원전 195년 위만(衛滿)에게 멸망될 때까지 900여 년 간 존속했던 것으로 일부 이해돼 왔다.

관련 사료를 보면 기자라는 인물은 중국 선진시대(先秦時代·서기전 221년 이전)의 여러 문헌에 보인다. 상서(尙書)는 '주왕에게 간하다가 감옥에 갇힌 기자가 무왕에 의해 풀려났고, 이후 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한 뒤 기자를 찾아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인 홍범(洪範)을 배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기자의 존재가 확인되나 한반도로 이동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복생(伏生)이라는 인물이 지은 '상서대전(尙書大典·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자의 한반도 동래설이 등장한다. 이에 의하면 기자는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고국인 은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다.

기자를 모신 사당이 시간과 장소를 훌쩍 뛰어넘어 우리고장 증평군 도안면에 존재하고 있다. '증평 기성전'으로, 지난 2004년 증평군 향토유적 제 2호로 지정됐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고 솟을대문에 담장을 둘렀다. 해마다 음력 3월15일과 9월 15일에 유림 제향이 열리고 있다. 영정 오른쪽 아래에 '김이삼 봉증'이라는 묵서가 있어, 후대 어느 때인가 이 사람이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성전에 대한 궁금증은 인물을 살펴봐야 그 의문을 풀 수 있다. 증평 기성전은 1914년(철종5) 한응각(韓應珏)이라는 인물이 기자(箕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처음으로 건립, 한두 차례 중창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생존시 한응각은 봄·가을에 걸쳐 평양과 함흥에 있는 기자묘(箕子廟)에 참배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함흥에 있던 영정을 거주지 증평으로 옮겨와 봉안했다.

그래도 남는 궁금증이 있다. 왜 유독 그가 기자를 추앙하게 됐느냐는 점이다. '청주한씨'에 그 정답이 있다. 지금은 관향(貫鄕) 문화가 많이 희석됐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달랐다. 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 불렀다. 청주한씨도 삼한갑족의 하나에 속했다.

청주한씨는 그 연원이 멀리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주한씨세보'에 의하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의 후대에 우성(友誠)·우평(友平)·우량(友諒)의 3형제가 존재했고, 이들이 각각 기씨(奇氏)·선우씨(鮮于氏)·한씨(韓氏)의 성씨를 갖게 됐다. 이런 논리라면 청주한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한란(韓蘭·853~916)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의 먼 후손이 된다. 한응각이라는 인물이 멀리 함흥까지, 그리고 증평에 기성전을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국내 사학계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자동래설을 잘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기자가 고조선에 들어왔다면 당시의 문화흔적도 함께 유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당시 대표적인 문화흔적은 갑골문이다. 그러나 한반도 어디에서도 아직 갑골문은 출토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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