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 716호 주인공, 제천 김길통

2010.09.05 17:53:22

조혁연 대기자

공신녹권은 말 그대로 공이 있는 신하에게 주어진 증서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공신녹권이 총 28차례에 걸쳐 700여명의 신하에게 수여됐다. 그러나 정권을 잃으면 공신 자제가 취소된 사례도 더러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례중의 하나가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연산군이 실각하자 수여사실 자체가 취소됐다. 이를 폐적(廢籍)이라고 했다.

성종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은 곡절이 많았다. 선왕 예종이 재위 1년2개월인 열아홉 나이로 급서했다. 이때 차기 국왕을 결정할 열쇠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쥐고 있었다. 법도대로라는 예종의 장자인 제안대군(당시 3살)이나 세조의 장손인 월산군(당시 15살)이 후사가 돼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는 제외되고 자을산군이 지명됐다. 그가 바로 성종이다.

이같은 흐름에는 이른바 신·구공신의 갈등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월산군의 장인인 박중선은 적개공신 출신으로 신공신에 속했다. 그러나 한명회가 주축이 된 구공신은 신공신 사위를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한명회가 있었다. 그는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친정 아버지였다.

성종은 만들어지다시피 보위에 오른 후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녹권을 내렸다. 이들이 좌리공신(佐理功臣)이다. 이들 중에는 김길통(金吉通·1408~1473)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러나 그가 성종 즉위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사료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 그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유는 당시에 받은 공신녹권이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충북대박물관이 이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보물 제 716호로, 충대박물관의 유일한 보물이다.

당시 1등 7명 등 총 73명에게 좌리공신녹권이 수여됐다. 그러나 이중 현존하는 녹권은 3등 이숭원과 4등 김길통의 것 뿐이다. 이같은 희귀성 때문에 김길통의 녹권은 보물로 지정됐다. 흔히 공신하면 권력 사유화, 재산축적 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김길통은 그런 사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당시 사관이 그를 이례적으로 호평을 하고 있다.

'김길통은 성품이 청간(淸簡)하여 치산(治産)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때에 한결같이 공도(公道)로써 시행하였는데, (…) 아들은 김순명(金順命)이다'.-<성종실록> 본문중 청간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는 충주와도 인연이 있어, 실록 일부를 충주사고로 이관하기도 했다. '인순부 윤(仁順府尹) 안지(安止)를 전주(全州)에, 예빈 소윤(禮賓少尹) 김길통(金吉通)을 충주(忠州)와 성주(星州)에 보내어 삼조(三朝)의 실록(實錄)을 봉안(奉安)하였다'.-<세종실록>

그는 제천 청풍을 본관으로 갖고 있는 등 우리고장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고 있다. 그러나 청간했던 그의 명성은 세습되지 못했다. 아들 순명은 품행이 자주 문제가 됐다. 여색을 심하게 밝힌 것으로 돼 있다.

'"김순명은 아비가 돌아간 뒤에 정처(正妻)를 소박하고 항시 서모(庶母)의 집에 있었는데, 어두운 밤에도 그의 침실(寢室)에 드나들기를 허물없이 하므로 추(醜)한 소문이 있었다"'.-<성종실록) 본문중 서모는 아버지의 첩을 일컫는다. 그의 묘는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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