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장원 1호, 초정에서 죽다

2010.09.07 21:17:51

조혁연 대기자

중국 송나라는 文과 武중 문을 더 높이 샀다. 그러다 보니 국방력이 약한 편이었다. 고려도 송나라를 본받아 숭문언무(崇文堰武)의 문치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참찬은 실은 문관 출신이다. 고려 문신들은 평소에는 붓을 잡고 있다가 유사시가 되면 전장을 지휘했다. 군료들의 반발이 없을리 없었다. 이것이 곪아 터진 것이 무신들의 난이다.

이와 달리 조선은 개국한지 얼마 안되 무과를 실시했다. 태조2년(1393)의 일로, 이때 장원 급제를 한 인물이 성달생(成達生·1376∼1444)이다. 무과 장원 1호인 셈이다. 실록이 이 부분의 활약상을 자세하게 기술해 놓고 있다.

'임오년에 나라에서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는데, 달생이 제1등으로 뽑혀 대호군에 임명되고, 나가서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무자년에 왜구들이 갑자기 근경(近境)에 침범하자 달생이 급히 이를 추격하매 왜구가 곧 달아났다. 태종이 어구마(御廐馬)를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서 위로하였다'.-<세종실록중 졸기>

본문 중에 어구마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임금을 위해 궁궐 안에서 기르던 말을 일컫는다. 그러나 성달생은 이후부터는 굴곡진 삶을 살게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귀양을 가고 파직도 당하게 된다. 그 첫번째가 부왕 면전에서 검을 휴대한 사건이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단순 경호 실수에 해당되나 부왕 눈치를 살펴야 했던지 세종이 격노했다.

'…칼을 차고 시립(侍立)한 것을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부왕(父王)이 여기 계옵신데 어찌 칼을 차고 옆에 있을 수 있느냐" 하고, 급히 재촉하여 누 아래로 내려가게 하고, 환궁하여 곧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게 하고, 또 이를 금지하지 못하였다 하여 좌대언 김효손(金孝孫)을 옥에 가두었다'.-<세종실록> 이때 하옥된 사람 중에 성달생이 포함돼 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나앉았다. 그러나 세종이 장성할 때까지 나라 일을 직접 처리할 생각이었다. 강상인이라는 인물은 이같은 태종의 의중을 모르고 군사에 관계된 내용을 세종에게만 보고했다. 이에 진노한 태종은 결국 강상인을 참형시킨다. 이때 성달생도 연루된 것으로 나타나 삼척으로 귀양가게 된다.

이후 성달생은 관찰사로서 기근이 든 평안도를 구휼하지 못했다고 해서 파직당하게 된다. 이때 세종으로부터 함께 떨어진 하명이 사마상경(私馬上京)이었다. 이는 왕명을 받들고 외방에 나간 관리가 죄를 지었을 때 역마(驛馬)를 타지 않고 사마(私馬)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게 하는 것을 일컫는다.

성달생이 곡절많은 삶을 69세로 마감했다. 시체를 염할 때는 저승길 양식으로 쌀을 넣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반함(飯含)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달생의 입에는 세종의 명에 의해 쌀이 아닌, 보패(寶貝)가 넣어졌다. '이미 소렴(小殮)을 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반함을 하였느냐" 하매, 유사가 창졸간에 빠뜨렸다. 임금이 꾸짖고 내탕고의 보패를 내어서 물리게 하고…'-<세종실록>

성달생은 우리고장 출신은 아니나 그가 숨을 거둔 곳이 초수(椒水·지금의 초정)이다. 그것도 세종 어가를 호종하던 중 급사했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세종은 평소 성달생에게 미안함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삼문의 할아버지가 성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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