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 72賢의 한 명, 청원 신덕린

2010.09.09 18:25:41

조혁연 대기자

'전왕이 강화에서 독살되어 훙하였다. 일찍이 왕이 왕위를 빼앗기고 강화에 갈 때, 전교령 신덕린(申德隣), 전교승 안길상(安吉祥) 등 4~5명이 시종하였는데 쫓아가 체포하여 순군옥에 가두고 박사신(朴思愼)만이 따라갔다. 공선은 충분하지 못하였고 왕래도 또한 끊기어 근심에 싸여 울부짖을 뿐이었다'.-<고려사절요>

본문 중 전왕은 고려 제 30대 임금인 충정왕(재위 1349~1351)을 말한다. 그는 선왕 충목왕(忠穆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서자된 몸으로 1349년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돼 즉위했다. 그러나 이승로(李承老) 등이 나이가 어린 것을 이유로 다시 원나라에 페위를 요청했고, 그 결과 함께 후계자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江陵大君·후에 공민왕)에게 보위가 넘어갔다. 그후 그는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다음해 독살당했다.

내용중 신덕린(?~?)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의협심이 매우 강한 인물로 비춰지고 있다. 그는 고려말 때도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의협심을 발휘했다. '두문동 72현'은 새 왕조 조선을 섬기는데 부끄러움을 느껴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고려 신하들을 말한다. '두문동'의 '두문(杜門)'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1397년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면서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과연 모두 그랬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72현 중에는 다른 지역에서 여생을 마친 인물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신덕린의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으로 예의판서를 지냈다. 그는 해서·초서·예서에 모두 능했고,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팔분체는 예서에서 2할, 전서에서 8할을 취한 서체로, 중국 한나라 때 왕차중(王次中)이 개발한 것으로 알여지고 있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목은 이색(李穡)이 이런 신덕린을 위해 한시 한 수를 지었다.

'소년 시절엔 날마다 애써 서로 맞이하여(少年日日苦相邀) / 잔뜩 취하고 깊이 읊어 짧은 노래 불렀는데(泥醉沈吟放短謠) / 한가할 때의 초서는 풍우처럼 상쾌하였고(閑裏草書風雨快) / 홀로 서 있는 청수한 모습은 먼 해산에 있네(靜中柴立海山遙) / 술동이는 그 언제나 따스한 봄을 더할런고(酒樽何日添春暖) / 귀밑털은 지금에 날리는 눈발을 띠었다오(·髮如今帶雪飄) / 친구 중엔 유독 공만이 아직 건재하니(契友獨公猶健在) / 늙은 목은 애타는 마음 정히 가련하여라'(可憐老牧政心焦)-<목은시고>

신덕린의 손자는 신장(申檣)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시험에서 할아버지의 명필 덕을 톡톡히 보게 된다. '지신사 박석명이 아뢰기를, "새로 급제한 신장은 전조(前朝)의 간의(諫議) 신덕린의 손자입니다. 신덕린이 글씨를 잘 썼는데 신장의 필법은 그와 비슷합니다"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신장을 상서의 녹사(錄事)로 임명하였다'.-<태종실록>

본문 중 '간의'는 간언을 잘 했던 신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덕린의 위패가 우리고장 청원 낭성의 묵정서원에 봉안돼 있다. 고령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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