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과 당대 쌍벽을 이루다, 충주 이승소

2010.09.16 18:51:06

조혁연 대기자

'흔한 산 어디엔들 오두막 못 지으랴(有山何處不爲廬) / 청산과 마주앉아 한 숨 길게 뿜어보네(坐對靑山試一噓) / 벼슬살이 10년에 다 늙었으니(簪笏十年成老大) / 백발로 귀거래를 짓게 하지 말라'.(莫敎霜·賦歸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실려 있는 한시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이례적으로 달려 있다. '영천군(永川君) 정(定)이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몹시 핍진(逼眞)하니, 서(徐)가 아니면 이(李)의 솜씨일 것이다"라고 써두었다.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는 시인으로서 제1인자였기 때문에 정(定)이 탄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강희안의 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거정이나 이승소를 거론한 것은 두 사람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음을 의미한다. 문병(文柄)이라는 표현이 있다. 달리 표현하면 '문학적인 권세' 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 중 이승소는 문명은 떨쳤는지 몰라도 문병은 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문장이 서거정(徐居正)과 더불어 이름이 맞먹었는데 서거정은 홀로 문병(文柄)을 마음대로 하고 이승소는 매양 미루어 사양하며 감히 항거하지 아니하였다'.-<성종실록>

이승소는 한시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세조대에 이르러 간행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친다. 이때 이승소도 동참,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지어 바쳤다. 이는 이승소가 훈민정음을 그만큼 빨리 체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부승지 이극감(李克堪)이 아뢰기를, "무릇 일을 속히 하고자 하면 반드시 정(精)하지가 못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언문(諺文)을 해득한 자 10여 명을 택하여 기일을 정하고 이를 시키면, 공력(功力)을 쉬 이룰 수 있고, 일도 또한 정(精)할 것입니다"하니, 중추 김구와 참의 이승소에게 명하여 우보덕, 최선복 등 12인을 거느리고 찬(撰)하게 하였다'.-<세조실록>

이승소의 이런 지적 능력은 관료 데뷔 때부터 어느정도 예상됐다. 그는 18살에 문과(혹은 대과), 즉 지금의 고시에 1등으로 합격한 수재였다. '나면서 영특하여 나이 열 세 살에 입학하였는데, 글을 읽을 적에 눈에 지난간 것은 문득 외었고, 모의 시험의 글을 짓는 데에 동류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정통(正統) 무오년에 열 일곱 살로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정묘년 봄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남성(南省)과 전시(殿試)에 모두 1등으로 발해(發解)하였다'.-<성종실록>

이승소는 경기도 양주 출생이다. 그러나 우리고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충주민의 어려움을 세조에게 보고했다. "본 고을의 금년 봄에 구울 염초(화약원료)와 잡물은 도회소인 충주(忠州)의 관원이 운반해 바치도록 독촉하니, 본 고을에서는 해마다 농사 지을 시기를 잃게 되어 오로지 초식으로써 힘입고 있으며, 이에 파리한 소와 말을 사용하여 먼 길에 운반해서 바치게 되어 그 폐해가 작지 않습니다'.-<세조실록>

그의 묘와 사당 청간사(淸間祠·향토유적 제 13호)는 충주 이류면 매현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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