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용인술의 희생양?, 보은 봉석주

2010.09.23 20:59:47

조혁연 대기자

조카(단종)의 보위를 유혈 쿠데타로 빼앗은 세조는 역대 왕과는 다소 다른 용인술(用人術)을 지녔다. 그는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반발하는 인물은 단호하면서 매우 가혹하게 다뤘다.

양정(楊汀·?~1466)이라는 인물이 술에 취해 세조에게 "용퇴할 의사가 없는지"를 물었다가 도성문 밖에서 효수 당했다. 반면 계유정난 공신이나 순종하는 신하에 대해서는 왠만큼 큰 잘못이 아니면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눈감아줬다.

대표적인 사례를 봉석주(奉石柱·?~1465)라는 인물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수양대군과 한명회 일파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는 계유정난 때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는'(단종실록) 역할을 맡았다.

봉석주는 그 공으로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면서 송석동(宋石同)의 아내 소사(召史), 유응부(兪應孚)의 첩의 딸, 노비 15구 등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전라도 차치사(處置使)로 임명돼 임지로 떠났다. '처치사'는 후에 '절제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그는 여기서 심하다 할 정도로 탐욕을 부린 것으로 돼 있다. 사헌부가 상소를 올린다.

"봉석주가 전라도 처치사가 되어 첩(妾) 2명과 계집종 2명을 거느리고 가서 외람되게 군수(軍需)를 허비하였고, 또 군수 미곡(米穀)을 가지고 면화(棉花)를 샀으며, 또 백성의 토지를 겁탈하여 경작(耕作)하였으니, 청컨대, 핵문하여 과죄하게 하소서."-<세조실록>

그러나 세조는 공신이라는 이유로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지 않는다. '전지하기를, "봉석주가 이미 내 앞에서 복죄(服罪)하였으니, 다시 물을 만한 일은 없고, 다만 죄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공신(功臣)이니 어찌 죄를 가(加)하겠는가" 하였다'.-<세조실록>

치죄에서 벗아난 봉석주는 이번에는 위세로써 박대년(朴大年·?∼1456)의 아내 해평윤씨를 취한다. 박대년은 박팽년의 아우로, 단종복위운동과 관련해 형 팽년과 함께 참형됐다. 그런 윤씨가 변심을 했고, 봉석주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취했다. 이 사실이 세조의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세조가 불만을 터트린다.

"너의 작위(爵位)는 모두 내가 내려 준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내 말을 듣지 않고 탐오한 것이 오히려 그러한가. 한 번 심하다고 말하였는데도 두 번 다시 하는 것이 옳겠느냐. 낯에 쇠가죽을 싼 것이 대저 몇 겹이냐"-<세조실록>

봉석주가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가 성립됐다. 이유는 "쇠가죽이 몇겹이냐" 등의 힐문에 따른 스트레스 누적으로 추정된다. 성종연간 한석규의 상소에서 일단 그 내용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김처의와 최윤과 봉석주가 서로 더불어 의논하기를, '생명을 아끼지 않는 군사 20명만 얻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는데, (…) 그 실상은 봉석주가 수모자(首謀者)입니다'.-<성종실록>

그는 이 역모죄로 인해 참수됐고, 아들도 연좌제에 따라 극형을 당했다. 봉석주는 우리고장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사당이 보은군 회북면 마동리에 위치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은 연산군 때 자손들의 상소로 죄가 씻기고 관직이 획복됐다. 따라서 그가 실제 역모를 도모했는지 여부는 다소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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