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다, 괴산 이방우

2010.09.29 00:46:22

조혁연 대기자

태조 이성계는 6명의 부인을 뒀고, 이들로부터 8남5녀를 얻었다. 원비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6남2녀,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2남1녀를 얻었다. 언뜻봐서는 8명 아들 모두가 아버지의 창업(조선 건국)을 적극 지원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맏아들 방우(1354~1393, 후에 진안대군) 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5남 방원(태종)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조선 건국을 명분에 반하는 것이라고 생각,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39살 짧은 생를 살았다. 실록은 이런 진안군의 일생을 폄하내지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진안군 이방우(李芳雨)는 임금의 맏아들인데,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경효(敬孝)란 시호를 내렸다'.-<태조실록>

상여가 나가는 장면도 딱 1줄만 써놓고 있다. '진안군을 장사하는데 백관들이 문 밖에서 전송하였다'.-<태조실록> 아마도 당시 사관은 조선 창업의 비협조자였던 그를 매우 마뜩찮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안군이 새롭게 재조명된 것은 그의 사후 4백년 가량이 지난 정조대였다. 정조 임금이 재위 13년째 되던 해(1789) 우리고장 충주 쪽으로 행차를 나왔던 모양이다. 이때 한 유생이 나타나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신은 진안대군 15세 손입니다. 대군의 묘를 함흥에서 풍덕(豊德)의 고개로 옮겨 모셨다고 하지만 그 문헌은 병화로 없어져 버리고 자손들은 먹고살기 위해 사방을 떠돈 지 지금으로 몇백 년이 되었으니, 그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조정에서 먼 친척이라도 후하게 보살펴 주신 덕분에 그렁저렁 살아가고 있는데, 지난 정미년에 물이 풍덕을 휩쓸면서 진안대군 처 삼한국부인 지씨지묘(鎭安大君妻三韓國夫人池氏之墓)라고 씌어진 짧은 비석이 발견되었고, 그 곁에는 대군묘재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 앞에는 석인(石人) 한 쌍이 쓰러진 소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홍재전서>

홍재전서는 정조가 지은 184권의 방대한 문집을 말한다. 본문에 나오는 '풍덕'이라는 지명은 지금의 충주시 주덕읍에 위치하고 있다. 이시종 충북지사도 일대가 고향이나 전의이씨이기 때문에 오늘 내용과의 관련성은 거의 없다. 아무튼 이 사실을 접한 정조는 종친 묘를 찾은 것에 감격했는지 한시 한 수를 남긴다.

'생각건대 우리 공은 / 태조의 장남으로 / 가정에 있어서는 효성스러웠고 / 신하가 되어서는 미더웠네 / 의로운 군대가 서쪽으로 돌아오자 / 필마로 동쪽으로 떠나가니 / 북산의 옛 마을로 / 곧 오태백(吳泰伯)이시었네 / 지극한 덕을 기록하고자 할진대 / 온화하기가 청풍과 같았네 / 공의 무덤을 / 함흥에서 풍덕으로 옮기니 /…/'-<홍재전서>

본문중 '의로운 군대'는 위화도 회군을, '동쪽으로 떠나니'는 보개산 은둔을, '오태백'은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중국 주태왕의 장남을 의미하고 있다. 진성군을 모신 사당인 '청덕사'(도 문화재자료 제 9호)가 우리고장 괴산 불정면 목도리에 위치한다. 묘가 지금도 충주 풍덕에 위치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의 부인이 충주지씨였던 점은 시시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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