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경세자 장례를 주관하다, 청원 정수충

2010.09.30 18:18:49

조혁연 대기자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이자 월산, 자산군(후에 성종)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1455년 세자로 책봉됐으나 스무살 나이인 재위 2년만에 요절했다. 일부 야사는 이에 대해 문종비 현덕왕후(단종 어머니)의 원한을 사 의경세자가 요절했고, 그러자 세조가 현덕왕후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등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쓰고 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의경세자 사망일은 1457년 9월 2일, 단종은 10월 21일로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다. 의경세자가 죽자 대쪽에 문장을 적은 책문이 올려졌다.

'아아! 약관의 나이에 슬하의 은애를 버리니, 소양(少陽)은 궁중의 문이 잠겨졌구나. 그 이름만 얻고 수명을 얻지 못하였으니, 정령(精靈)이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슬퍼하노라'.-<세조실록> 본문 중 '소양'은 의경세자의 어릴적 이름이다. 그는 후에 덕종으로 추존된다.

의경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주상자(主喪者)에 임명된 인물이 정수충(鄭守忠·1401∼1460)이다. 주상자는 말 그대로 상사(喪事)를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인물을 말한다. 그는 묘를 관리하는 수묘관으로도 임명됐다.

'명하여 염(斂)에는 왕자의 면복을 쓰고, 무덤 속의 모든 일은 일체 임금의 산릉을 본뜨게 하였다. 하원군 정수충을 수묘관(守墓官)으로, 좌승지 한계미를 대전관(代奠官)으로 삼았다'.-<세조실록>

지금까지의 진행은 세조가 정수충의 매우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믿음은 세조가 잠저생활을 할 때 싹튼 것으로 보인다. 잠저는 임금이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생활하던 민가를 말한다.

'내가 잠저에 있을 적부터 이미 능히 뜻을 기울였고 정란(靖亂)하고 정사를 보필하던 날과 여얼이 난을 선동하던 즈음에도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자리를 피하지 않고 시종 한결같은 마음으로써 나의 금일의 아름다움이 있게 하였다'.-<세조실록> 본문 중 '내가'는 세조 자신으로, 내용은 공신 책훈에 따른 교서다. 단종 옹위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는 보다 끈끈한 관계를 보여준다.

'정수충이 세조를 알현하여 말하기를,"이양(李穰)은 안평대군에게 깊이 아부하는 자이고, 민신(閔伸)은 안평대군에게 은근히 아부하는 자이니, 만약 이들을 믿는다면 반드시 모함에 빠질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그렇다. 웃음 속에 칼을 품은 자들이다"하였다'.-<세조실록> 모시던 주군이 일인자가 되면 세칭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절제와 절도를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관이 이례적인 호평을 하고 있다.

'정수충은 성품이 맑고 평온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가산(家産)을 일삼지 않고 권문(權門)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아비가 죽자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절이니, 배움이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이겨냄을 절(節)이라 한다'.-<예종실록>

정수충은 우리고장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위패와 영당을 모신 문절영당(文節影堂)이 하동정씨 집성촌이 있는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 위치한다. 영정 제작과정을 적은 '영정중모기'도 함께 존재한다. 영정과 함께 도유형문화재 제 159호이다. 영정은 1855년 화사(畵師) 이덕명(李德明)을 초빙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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