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과 술친구(?)가 되다, 충주 손순효

2010.10.07 18:47:19

조혁연 대기자

1482년(성종 13년) 음력 8월 16일. 조정에서는 폐비윤씨(연산군 생모)를 계속 살려둘 것인가, 사약을 내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 등이 사약이 마땅하다고 발언했다. 사약 집행자는 이극감의 아들인 형방승지 세좌(世佐·1445~1504)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石+霜)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성종실록>

'그 집에 유숙하라'는 것은 그날밤 사약을 집행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소수지만 원자(연산군)의 생모인 점을 들어 극형만은 안된다고 말한 인물이 있었다. 손순효(孫舜孝·1427~1497)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가 소를 올리기를,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 (…)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연려실기술>

폐비윤씨는 사약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절규하는 유언이 중종 때 안로가 지은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실려 있다. "내 아이가 다행하게 보전되거든 이 수건을 전해서 나의 슬프고 원통하였던 사연을 알려 주오. 또 나를 어련(御輦)이 다니는 길가에 묻어서 임금의 거마(車馬)라도 보게 하여 주오. 이것이 나의 원이오"

사약의 고통으로 수건은 피눈물로 얼룩졌다. 폐비윤씨 사사후 12년만에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고 임사홍의 고자질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피바람이 몰아쳤다. 앞서 언급한 인물 중 손순효를 제하고, 산 자는 극형에 처해졌고 이미 죽은 자는 부관참시됐다. 그것도 모자라 일부는 두개골이 가루로 만들어져 천지간에 뿌려졌다.

손순효는 관료로서의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일기>는 그의 사람됨을 '위인은 충직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일을 하는 데는 모자라서 가는 곳마다 실적이 없으나, 그것이 경중이 될 수는 없다'라고 적고 있다. 대신 성종과의 사이에 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임금은 그 재주를 사랑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매양 그가 술 마시기 좋아함을 경계하여, "석 잔에서 더 마시지 말라" 하니 공은 "삼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손순효가 어찌어찌 하다 또 과음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한번의 질책이 있은 후 그 끝은 인간적인 술친구(?)의 모습으로 끝났다.

'임금은 궁인에게 명하여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니 공은 이내 취하여 쓰러졌다. 임금이 남색 비단 철릭(帖裏)을 벗어서 덮어 주니…'.-<연려실기술>

그의 유언은 애주가답게 '좋은 소주 한 병을 무덤 앞에 묻어 달라"(연려실기술)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와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묘와 신도비가 천등산 기슭인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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