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말 "아들이 보고싶다", 청주 이원

2010.10.14 22:50:15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때 당인(黨人)은 같은 당파, 당여(黨與)는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거의 비슷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이원(?~1504) 은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당인으로 분류됐다. 먼저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신문에 답하는 내용이다.

'윤필상 등이 물으니, 일손이 대답하기를, "신종호는 종직이 서울에 있을 적에 수업하였고, 조위는 종직의 처제로서 젊어서부터 수업하였고, 채수·이계맹·이주·이원은 제술(製述)로 과차(科次)받았고… " 하였다'.-<성종실록>

본문중 이원의 이름이 보이고 있고, '제술로 과차받았고'라는 표현은 지금으로 치면 시문 지도를 받은 것 쯤으로 해석되고 있다. 신문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이원은 김종직과의 관계를 가급적 희석시키려 한다.

"신은 일찍이 종직에게 수업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종직이 동지성균으로 있을 적에 신이 생원으로 성균관에 거접하면서 목은(牧隱)의 관어대부를 차운하여 종직의 과차로 나아가니, 종직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일손이 신더러 그 제자라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오며…'-<연산군일기>

결국 이원은 김종직과의 당인 관계가 인정돼 1498년(연산군 4)부터 곽산, 나주 등지를 이배하며 귀양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6년 뒤 이번에는 폐비윤씨 사건이 원인이 된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거듭 얘기하지만 이즈음의 연산군 정신상태는 거의 광인에 가까웠다. 이유없이 보복하고자 하는 심리는 무오사화 유배자들로도 그 불똥이 튀었다.

'전교하기를 "이원, 최부(崔溥) 같은 자들은 두어 보았자 어디에 쓸 것인가. 반드시 엄중히 징계한 뒤라야 사람들이 경계할 바를 알 터이니, 모두 잡아오라" 하였다.- <연산군일기>

이원이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다시 압송됐다. 의금부 관원이 이원의 마지막 말을 물었던 모양이다. 그 마지막 말은 "아들이 보고 싶다"였다. '승지 윤순(尹珣)이 의금부 낭관을 불러 물으니, 말하기를, "최부는 한 마디 말도 없었고, 이원은 '우리 아들이 왔느냐. 보고 싶다' 하였고,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니…'-<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는 이원의 마지막에 대해 '초경에 형을 집행하고 이튿날 백관에게 효시(梟示)하였다'고 쓰고 있다. 사관은 효시된 자의 인물평을 쓰지 않는 것이 관례다. 그럼에도 당시 사관은 이원에 대해 이례적으로 인물평을 써놨다.

"이원은 방달(放達)하여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기우(氣宇)가 헌앙(軒昻)하여 세속 티가 없으며 사람을 대하면 귀천으로 예의를 바꾸지 아니하며, 술먹기를 좋아하고 담론을 잘하였는데, 이때 와서 죽임을 당하게 되니 조야(朝野)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본문 중 방달은 행동이 거리낌이 없는 것을, 기우는 기개, 헌앙은 당당한 모양새를 일컫는다. 사료상 그의 지역 연고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만 각종 사료는 그의 아버지 공린(公麟)에 대해 '여러 번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되었고 청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이원도 우리고장 청주 일대를 연고로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박팽년 딸이 그의 어머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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