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를 두번이나 겪다, 음성 김세필

2010.10.18 00:22:22

조혁연 대기자

사약을 받은 폐비윤씨(연산군 생모)는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묻혀졌다. 폐비가 되기 전까지 일국의 왕비였으나 그녀의 묘비에는 '尹氏之墓'가 새겨졌다. 이른바 민묘(民墓)라는 뜻이다. 한때 지아비였던 성종은 "이렇게까지 해준 것도 과분하다"는 투의 표현을 한다.

'어서(御書)하기를, "단지 제사 의식만 정하면 되지 어찌 명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명호를 더하려 하면 이것은 바로 추숭(追崇)하는 것이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겠는가. 죄지은 사람이 제사나마 받는 것으로 족하다"하였다'.-<성종실록>

연산군은 보위에 오른지 얼마 안 돼 임사홍의 고자질로 자신의 생모가 억울하게 사사된 것을 알았다. 그는 어머니 폐비윤씨의 한을 풀어주고, 또 묘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문제를 신하들과 논의했다. 먼저 연산군이 말문을 연다.

'전교하기를, "성인(聖人)의 칠거(七去)의 법이 있으니, 만일 그런 죄라면 버리고 말 것이지 하필 죽여야 하는가.(…) 성종(成宗)께서 명철한 임금이시지만, 어찌 잘못한 일이 없겠는가· 그때의 재상들이 극력 간하였다면 반드시 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연산군일기>

그러나 유형은 다르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반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과 예를 참작, 추숭하여 효도하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지금 다시 더할 수 없다'고 한 자는 황성창·김세필·정침·유인귀·신봉로이고, '사초와 대석의 설치는 비록 선왕·선후(先后)의 능침이라 할지라도 모두 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천묘(遷墓)에 배설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고 한 자는 그때 정승이며…'-<연산군일기>

연산군은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모 폐비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숭됐고 묘이름도 회묘(懷墓)를 거쳐 회릉(懷陵)으로 격상됐다. 페비윤씨 추숭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추숭에 반대했던 인물에 대한 연산군의 보복이 시작됐다. 앞서 언급한 사람 중에 김세필(金世弼·1473∼1533)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그도 연산군의 광기를 피하지 못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집의 황성창과 김세필, 헌납 정침, 정언 유인귀와 신봉로는 모두 공죄(公罪)로서 장 80대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내일 국기(國忌) 뒤에, 승지들이 감독하여 형장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하였다'.-<연산군일기>

본문 중 국기는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기일을 의미하고, 부처는 유배의 또 다른 말이다. 그는 1504년 남쪽 섬 거제도로 귀양가야 했다. 다행히 귀양생활은 오래 하지 않았다. 1년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실각하면서 유배생활에서 풀려났다. 폐비윤씨의 묘도 '회릉'에서 다시 '민씨지묘'로 돌아갔다.

김세필은 관운이 없는 편이었다. 또 한번 설화를 입게 된다. 이번에는 기묘사화 때의 올곧은 소리가 문제가 됐다. 왕도정치를 추구했던 그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된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라고 간언을 하다 장배(杖配)됐다. 장배는 곤장을 맞고 귀양가는 것을 말한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고향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후진 양성에 몰두하다 예순살로 졸했다. 음성 지천서원과 충주 팔봉서원 두 곳에 그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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