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인 일본이주, 주된 원인은 전란"

충대 양기석 교수 논문
한성 함락때 양국간 문물교류 제도화
백제부흥운동 실패후 가장 많이 옮겨

2010.11.29 20:18:16


고대 백제인들이 일본열도에 대규모로 건너간 것은 삼국시대 전란도 주요 원인의 하나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마한·백제 사람들의 일본열도 이주와 교류'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얼마전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충북대 양기석(역사교육과) 교수는 '백제인들의 일본열도 이주'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먼저 혼용되고 있는 귀화인(歸化人), 도래인(渡來人) 등의 단어를 언급, "이중 도래인이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인 의식 속에 귀화인은 삼한을 복속시킨 이래 皇化를 사모하여 건너 온 한반도 사람들을 의미하고, 도래인은 우수한 선진 문물·기술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들어온 외부 사람을 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양 교수는 고대 백제인들의 일본열도 이주를 본격적으로 거론, "단기간에 일회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 3차례에 걸쳐 집단성을 띤 대규모 집단 이주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 등에 근거해 이를 △1기: 4세기말~5세기 중엽 △2기: 5세기 후반~6세기 전후 △3기: 7세기 후반 등으로 구분했다.

양 교수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1기가 속하는 시기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대규모 백제 공격이 있었다"며 "이를 전후해 당시 백제 기술자들의 대규모 일본열도 이주가 있었다"고 밝혔다.

또 "2기가 속한 시기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을 공격, 그 결과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긴다"며 "이때 많은 백제인들이 전란을 피해 일본열도로 대규모 이주를 했고, 이후 양국간 문물교류가 제도화됐다"고 밝혔다.

이밖에 3기에 대해서는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또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당수 백제인들이 망국의 한을 품고 가장 큰 규모로 일본열도로 이주한다"고 밝혔다.

이상에서 보듯 백제인의 일본열도 이주에는 삼국시대 한반도 전란이 주된 이유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로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거나 외교적인 이유로 도래인이 된 사례로 발견되고 있다. 전자는 소아씨(蘇我氏) 가문, 후자는 개로왕 동생 곤지(昆支)의 사례가 꼽히고 있다.

양교수는 소아씨에 대해 "웅진 천도때 문주왕을 보필한 木협(十자 없는 協)滿致와 동일한 인물"이라며 "당시 권력투쟁에서 병관좌평 해구(解仇)라는 인물에 패해 도일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후자에 대해서는 "곤지는 무려 17년 동안 일본에 머무르며 왜가 친백제노선을 걷도록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이 시기에 한반도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 등 왜계유물이 나타나는 것도 양국 교류의 결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편 당시 도래인들은 대가야가 망한 후 남해안-제주도-대마도-이키(臺枝)섬-규슈 등의 해상루트를 이용했고, 또 열도내 정착은 오사카, 나라, 게이오 부근의 긴키(近畿) 지방에 가장 많이 한 것으로 고고학 조사결과 나타나고 있다.

양 교수는 "당시 왜왕들은 백제 도래인을 흔쾌히 받아들였다"며 "이는 도래인이 갖고 온 선진문물과 철기술이 왕권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