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주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임진왜란후 개인상업 발달로 속속 등장
간판은 없고 '오동나무집' 등으로 불려
맨당에 거적 깐 잠자리…숙박비 안받아
토지 임차료 비싸 종사자들 곤궁한 생활

2010.12.27 18:23:32

전통적 의미의 주막(酒幕)은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1백여년 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가 얼마전 '광무양안과 충주의 사회경제구조' 제목의 연구총서를 출판사 '혜안' 이름으로 펴냈다. 제목 중 '광무'(光武)는 대한제국 연호로, 1897년(고종 34)에 제정됐다.

440여쪽 분량의 이번 연구총서에는 충북대 신영우, 연세대 최윤오 교수 외에 강은경, 김의환, 서태원, 박경안, 임용한(이상 중원문화연구소 연구원) 씨 등이 논저자로 참여했다.

이중 대한제국기 충주 지주제, 주거환경 등은 올 상반기에 소개한 바 있다. 광무양안과 관련된 박경안 연구원의 '대한제국기 충주군 금목면의 주막에 관하여' 논문은 이번에 처음 소개됐다.

☞광무 양안은

고종황제는 광무2년(1898)부터 7년 동안 양전(量田) 사업을 실시했고, 그 결과를 이른바 양안(量案)으로 기록했다. 이때의 양안에는 토지 외에 가옥, 인물, 지명, 지리, 상점, 주막, 관청, 종교시설 등의 조사 내용이 담겨져 있다.

대한제국기 주막 운영은 토지 임차료가 높아 생각보다 재미를 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은 김홍도 작 '주막'.

당시 충주군은 괴산 불정, 음성 금왕 등도 포함하고 있는 상태로, 금목면(金目面)은 지금이 음성 금왕읍을 일컫고 있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임진왜란 후 원(院) 제도가 폐지되고 개인 상업활동이 발달하면서 주막문화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들 주막은 △간판은 없었으나 이름은 있었고 △따라서 일례로 '오동나무집', '과부집' 등으로 불렸으며 △잠자리는 맨땅에 거적을 까는 정도였기 때문에 숙박비는 받지 않았다.

당시 충주군 관내에는 이런 주막이 총 28개 존재했다. 그리고 논문의 대상이 된 금목면에는 7개가 위치했다. 이는 충주 전체의 25%에 해당될 정도로 매우 높은 수치다.

박 연구원은 이같은 현상에 대해 △금왕이 서울과 진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결점점이고 △근처에 규모가 큰 무극장이 서는 등이 주요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논문은 이밖에 금목면 주막의 운영과 생계 구조에 대해 실록 내용을 인용하는 등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당시 주막 주인들은 농토에 부과되는 토지세 외에 '가대세'(家垈稅)를 별도 납부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대세는 수익자부담 원칙에 의해 세든 사람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토지 임차료를 의미한다.

이 가대세는 주막 주인에게는 다소 무거웠을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수입이 불규칙했던 주막 종사자들은 매우 곤궁한 경제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음 사례가 이를 어느정도 입증하고 있다. 금목면 관내 '조주막'의 경우 양안상의 대주(垈主·집터 주인)는 '權應五'로 돼 있으나, 가주(家主·세입자)는 '空'(공)으로 표시돼 있다.

이는 집터 주인은 대주로서 변동이 없으나 건물은 주막 영업이 안 되면서 비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박 연구원은 "당시 지주들은 주막 등 비농업적인 분야에도 막 진출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조선후기~구한말 시기의 한국사회 내재적 변화를 하나의 단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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