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그의 녹을 먹었다, 보은 박삼길

2011.02.27 19:22:50

조혁연 대기자

'독대'(獨對)는 임금과 신하의 은밀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자주 문제가 됐다. 문장가로 유명한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상소를 올린다.

"옛 제도에 따라 4품 이상으로 하여금 날마다 차례를 돌려 대답하게 하시어 더욱 말할 길을 넓히시어, 아랫사람의 심정을 다 아룀으로써 신하의 사특하고 정직함을 살피시면 매우 다행이겠나이다."-<세종실록>

변계량이 건의한 것은 독대의 반대개념인 이른바 '윤대'(輪對)였다. 윤대는 글자 그대로 문관은 6품 이상, 무관은 4품 이상의 관리가 임금 앞에 나아가 직무에 답변하는 것을 말한다.

윤대는 임금의 근무 강도를 고려해 하루 5명을 넘기지는 않았다. 연산군 때 한 신하가 윤대에 나아갔다. 얼마전에 강원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연산군 시절에도 비슷한 폭설이 내렸던 것 같다.

'윤대를 받았다. 내섬시부정 박삼길(朴三吉)이 아뢰기를, "(…) 강원도에 한 길 이상의 많은 눈이 내려서 노루·사슴들이 한 곳에 모여 서서 많이 굶어 죽었고 살아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연산군일기>

박삼길의 윤대는 계속 된다. 아래 인용문에 나오는 '여수'는 군대의 우두머리를, '패두'는 인부 열 사람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노가다 십장 정도다.

'진상하는 산 노루는 영서의 각 고을에 나누어 정하여 순번대로 진상하기 때문에, 여러 달 동안 양식을 가지고 먼 고을까지 가서 잡아야 하는데, 조금만 기한에 미치지 못하면 여수(旅帥)와 패두(牌頭)를 심하게 독촉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러워 생업을 잃고 도망쳐 흩어집니다.'-<연산군일기>

연산군과의 윤대에서 '진상'의 폐단을 과감히 말했던 박삼길은 우리고장 보은 인물이다. 연산군은 약간의 곡절이 있었지만 박삼길의 언행에 충직함이 있다고 보았는지 그를 이조참의까지 끌어올린다.

'김수동을 겸지춘추관사로, 이손을 형조 판서로, 박삼길(朴三吉)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연산군일기> 이조참판(吏曹參判)은 종이품으로, 지금으로 치면 행정자치부 차관 쯤에 해당한다.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폭군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후에 중종)을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이때 승승장구하던 박삼길은 중종의 중용을 뿌리치고 고향 보은으로 낙향한다. 명분은 '그래도 나는 그의 녹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주(연산군)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지만 나는 그의 녹작(祿爵)을 받아 직위가 2품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가 폐출되는 것을 차마 보겠는가" 하고, 드디어 한 필의 말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인과 함께 손수 채원(菜園)을 가꾸고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생활하였으니…'-<송자대전>

그가 낙향한 곳은 지금의 보은읍 금굴리 은사뜰이다. 은사뜰을 한문으로 옮기면 '隱士坪'이 된다. 선비가 숨은 곳이라는 뜻이다.

정황상 그가 은거하면서 은사평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송자대전에는 은사평이 자주 등장한다. '報恩治南五里許 有隱士坪 故參判朴公居之'(보은 남쪽 5리에 은사평이 있는데 옛날 참판을 지낸 박공이 그곳에 산다). 이때의 박공은 박삼길을 지칭한다. 그의 묘는 보은읍 수정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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