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적인 상소문을 쓰다, 충주 강유선

2011.03.08 18:03:51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임금 중 재위 기관이 가장 짧았던 인물은 인종(仁宗·1515∼1545)이다. 임금이 된지 8개월만에 병사했다. 야사에 계모 문정왕후(1501~1565·명종의 생모) 독살설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어느날 인종이 문정왕후가 거처하고 있는 대비전을 찾았다.

이때 그녀가 그에게 떡을 건냈고, 인종은 이를 받아 먹은 후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못가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 독살설의 전모다. 인종은 재위기관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원시키는 등 친사림파적인 정책을 많이 펼쳤다.

인종의 친사림파적인 정책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도 많이 작용했다.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여론정치의 일환으로 상소권이 주어져 있었다. 이와 관련, 당시 유생들은 세번의 상소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격정적인 내용이 자뭇 인상적이다.

'아아,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망하게 하려고 합니다. 조광조처럼 어진 사람이 있어도 억울하게 죽었고 (…)신들은 땅에 엎드려 마음 아파하면서 천심(天心)이 마침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도(道)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조광조 한 사람이 죽자 온 세상이 취제하여 곧고 바른 말과 행실이…'-<인종실록>

인용문 중 '취제'는 더운 국에 데어서 혼이난 사람은 찬 나물도 겁내어 불어서 식힌다는 뜻으로, 전에 당한 일 때문에 지나치게 경계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때의 상소문은 외형상 유생 여러 명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그러나 실록은 이때의 상소문은 사실은 강유선(康惟善·1520∼1549) 한 사람이 모두 지었다고 사론을 적었다. '전후에 있었던 유생의 상소는 다 진사 강유선(康惟善)이 지었다.'-<인종실록>

서두에 인종의 재위 기간이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짧았다고 밝혔다. 전도가 양양해 보였던 강유선은 주군 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의 고향이 다름아닌 우리 고장 충주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생애에 엄청난 불행을 가져왔다.

1549년(명종 4)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 일어나면서 당시 충주지역 선비 40~50명이 극형을 당하거나 귀양가야 했다. 그리고 연좌제에 따라 충주목은 유신현으로, 충청도는 청홍도로 읍호가 강등되거나 변경됐다.

한 지역에서, 그것도 당대 지식인 40~50명이 한꺼번에 처형당한 것은 엄청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사관도 이를 의식, '충주 전체가 온통 비었다'(명종실록)라고 적었다.

이같은 표현은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도 등장, '어떤 이는 평생에 이홍윤과 후정의 얼굴도 모르면서 죽은 사람까지 있어서 충주(忠州)의 한쪽이 거의 텅 빌 정도였다'고 적고 있다. 강유선은 매를 맞아 죽는 장살형에 처해졌다. 그러자 당시 사관(史官)이 실록을 다음과 같이 썼다.

'유선(강유선 지칭)은 성품이 강개하고 악을 미워하였으며 가정에서도 효도와 우애가 남달랐다. 인종 때의 유생들의 상소도 유선이 기초한 것인데 (…) 유선은 이연경(李延慶)의 사위요 이홍윤은 곧 연경의 재종질(再從姪·육촌형제 아들)이다.'-<명종실록> 충주사림은 이때 거의 괴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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