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군자로 칭해지다, 보은 성운

2011.03.17 22:20:50

조혁연 대기자

대곡 성운(成運·1497~1579)은 본래 한양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형 '우'가 을사사화의 참화를 당하자 우리고장 보은을 찾았다.

'공(성운 지칭)은 나면서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일찍이 세속의 그물을 벗어났다. 그 형 우(禹)가 을사사화에 비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 속리산에 은거하였다. 시가 그 인품과 같아서 한가롭고 아담하여 서호처사(西胡處士)의 운치가 있으니…'-<연려실기술>

속리산을 찾은 성운이 마냥 은둔만은 고집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문집에는 거유 조식(曺植·1501~1572) 등과 교유한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다음은 조식에게 보낸 한시 한 수다.

'높은 기러기 날개 치며 남쪽 향해 날아가니(冥鴻矯翼向南飛) / 때는 바야흐로 가을 바람 낙엽질 때라(正値秋風木落時) / 땅에 가득한 벼와 기장을 닭과 오리는 쫓아다니지만(滿地稻梁鷄鶩豚) / 푸른 하늘 구름 밖에서 스스로 기심을 잊네(碧天雲外自忘機)'-<해동잡록>

익히 알다시피 그의 대표 문집은 대곡집(大谷集)이다. 그러나 이 문집은 성운 자신이 완성한 것은 아니다. 사연이 다소 깊다. 아들이 편집에 나섰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그 손자대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됐다.

성운은 아들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조카사위인 김가기(金可幾·1537∼1597)를 후사(後嗣), 즉 양자로 삼았다. 조선시대 사람에게 있어 후사 개념은 유별났다. 후사는 뒤 즉 '대를 잇는다'는 뜻으로, 다른 말로는 '후승'(後承)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대에 관한 것 외에도 제삿밥 때문에 후사를 걱정했다. 제사 때 밥을 얻어 먹고 못 얻어 먹는 것을 현세의 사고방식대로 인식했던 것 같다.

김가기는 성운의 문집 편찬에 몰두하던 중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마을에 침입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순절했다고 사료는 쓰고 있다.

그리고 당시 부인 전주유씨(全州柳氏)도 남편을 구하려다 순절했고, 며느리 고령신씨(高靈申氏)는 피난 중 왜적을 만나 자결했다. 일가 셋이 비슷한 시기에 숨진 셈이 되고 있다.

대곡집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손자 덕민(德民)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 유근(柳根자·1549~1627)의 협조를 받아 겨우 간행될 수 있었다. 이때가 성운 사후 20여년이 지난 1603년이었다.

대곡집은 보은 종곡에 은거할 때 지어진 시가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촌거'(村居), '한거'(閑居) 등과 같이 이른바 휴한시(閑居詩)의 감흥을 읊은 내용이 많다.

이외 조식, 성제원과 주고 받은 시 그리고 보은 주변의 고을과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경관을 읊은 시들도 적지 않다.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은 이황(李滉),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성제원(成悌元), 이희안(李希顔), 김대유(金大有) 등을 육군자(六君子)로 칭했다. 이중 성운과 성제원은 보은 인물이다.

보은읍 성족리 산35번지 속칭 가마실에 성운의 묘소와 묘갈이 위치하고 있다.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 70호다.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동춘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양아들 김가기와 그의 부인 전주유씨 묘도 성운의 묘 아래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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