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충북사람, 어떻게 살았을까

충북대-중원문화연구소, 충북 전통사회 복원 학술회의
한말 작성된 토지대장 '광무양안' 문화콘텐츠 보고

2011.03.20 18:18:13

'한말 충북 전통사회의 복원과 문화 콘텐츠 개발' 학술회의가 지난 17일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신영우 교수가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충북대 사학회와 중원문화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한말 충북 전통사회의 복원과 문화 콘텐츠 개발' 학술회의가 지난 17일 학내 개신문화관에서 열렸다.

한말(韓末)은 시간적으로 1백여년전 밖에 안 되지만 국가적 대혼란기였기 때문에 사료가 풍족하게 남아 있지 않다.

충주 교동초등의 광무양안 사표 모습이다. 이 사표는 건물의 규모(가운데 사각형)와 위치를 알려준다. 그림중 '南路'는 남쪽으로는 길이 지나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무양안(光武量案)을 바탕으로 열린 이날 학술회의는 큰 주목을 받았다. 광무양안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1905년 사이에 작성된 토지대장을 일컫는다.

특히 그 주제가 '1차적으로 충북 전통사회 복원하고 그에 따른 지역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자'는 것 이어서 학계뿐만 아니라 도내 지자체의 관심을 끌었다.

이날 학술회의는 신영우(충북대 사학과) 교수의 기조 발제에 이어 임용한(중원문화연구소) 연구원의 '주거 현황과 건물, 유적의 복원', 김의환(〃) 연구원의 '한말 충북의 가문, 인물의 새로운 조명' 순으로 1부가 진행됐다.

이어 2부에는 강은경(〃) 연구원의 '1백년전 명성황후의 피난처 충주 신흥마을', 남금자(충주박물관) 학예사의 '대한제국기 충주 대지주 김갑규의 가예와 경계기반' 발표가 이어졌다.

토론자로는 이해준(공주대), 김양식(충북학연구소), 길경택(충주박물관), 정기범(음성군청) 씨 등이 참여했다.

◇ 신영우 교수
그는 '한말 충북 전통사회의 복원과 문화 콘텐츠 개발' 제목의 기조 발제에서 전통을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 우리 문화의 바탕'으로 규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작성된 광무양안은 1백여년 전의 충북 전통사회를 복원하는데 매우 소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충북에는 충주, 진천, 괴산, 음성, 회인, 연풍, 청안, 영춘, 문의 등 9개 지역의 광무양안 사료가 남아 있다.

이는 도세(道勢)를 기준으로 할 때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이를 문화 콘텐츠로 개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계는 물론 도내 지자체에도 커다란 자산이 되고 있다.

그는 양안을 활용해 개발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분야로 △지역사 △마을사 △문중사 △선양인물 발굴 △향토전시관 사료 보강 △교육자료 활용 △스토리텔링 연계 △체험활동 사업 △드라마 연계 등을 꼽았다.

그는 "현재 각 시군지(誌)는 종이 질만 바뀐 채 과거 내용이 그대로 다시 출간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광무양안 분석자료를 활용하면 지역 근대기 역사는 획기적으로 보완된다"고 밝혔다.

◇ 임용한 연구원

그는 '읍과 건물-주거생활과 건물, 유적의 복원' 제목의 발표에서 충주를 언급, "광무양안 자료를 활용한 경우 당시 관아의 건물 종류와 칸수까지 정확히 복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관아의 내아는 19칸 초가집, 외아는 37칸 기와집으로 기록돼 있다"며 "이는 기와집이 1백여년 전에도 매우 귀한 존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충주관아 밖의 주요 공공건물도 언급, "1백여년 전 충주 우체시(지금의 우체국)는 10칸-기와집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며 "이는 당시 우정업무가 정부 정책의 우선 순위에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 임 연구원은 "현재 음성군은 반기문 총장 생가 마을을 복원해 놓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다"며 "광무양안에는 당시 생가마을의 주거규모와 형태가 정확히 기재돼 있다"고 말했다.

◇ 김의환 연구원

그는 '한말 충북의 가문과 인물의 새로운 조명' 제목의 발표문에서 동족마을과 개인의 사회경제 기반을 집중적으로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신잡(1541~1609·신립의 친형)이 진천국 이곡면(현재의 이월면)에 입향한 이후 평산신씨 가문은 15명의 군영대장을 배출하는 등 조선시대 전형적인 장신가문(將臣家門)으로 성장한다.

그 결과, 광무양안이 작성된 1백여년 전에는 이곡면 전체 토지의 32%를 소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된다고 김 연구원을 밝혔다.

그는 괴산지역도 언급, "홍승목, 홍범식, 홍명희 등 이른바 풍산홍씨 3대의 당시 토지소유와 경작 형태에 대한 정보도 광무양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밝혔다.

◇ 강은경 연구원

그는 '100년전 명성황후의 피난처 충주 신흥마을' 발표에서 그녀가 50일간 숨어지내던 충주 노은면 신흥마을을 집중 언급했다.

광무양안에 의하면 당시 신흥마을의 토지 비옥도는 1등급은 없고 2·3등급이 65%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임에도 불구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했던 지역임을 의미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50일간 숨어지내던 '이시일 가옥'은 그 원형은 초가에서 개량주택으로 바뀌었으나 당시 주춧돌은 현존하고 있다

이와 관련 강 연구원은 이시일이라는 인물을 보충 설명, "광무양안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며 "이는 그가 당시 초가집의 법적인 소유자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그는 나무 장사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 남금자 학예사

그는 '대한제국기 충주 대지주 김갑규의 가계와 경제기반' 발표에서 제목 그대로 김갑규라는 인물을 집중 분석했다.

김갑규(1854~1924)는 헌종비 효현왕후의 친정조카로 국권이 빼앗긴 후 충주로 낙향했다. 광무양안에 그의 당시 경제기반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남 학예사에 따르면 그는 낙향 후 충주 일대에 약 68정보(1정보 3천평)와 25칸의 기와집을 소유하게 된다.

그는 이에 대해 "안동김씨 김갑규는 별서 외에도 명성황후 민씨 세력과 혼인관계를 통해 재산을 증식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의 지주경영은 아들로 이어진 뒤 산업자본으로 전환된다"고 밝혔다.

/ 조혁연 대기자

☞용어설명

◇광무양안 = 대한제국이 조세 부과 목적으로 1900~1905년 사이에 전수조사 방법으로 제작한 토지대장으로 소유자, 경작자, 토지면적·모양, 비옥도, 농가소득, 가옥 규모·형태, 주막 등 1백여년전 토지에 대한 정보가 망라적으로 기록돼 있다.
◇별서(別墅) =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지은 집으로,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경영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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