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사가독서의 단명, 청원 박증영

2011.03.27 17:53:32

조혁연 대기자

얼마전 청주인물 박훈(朴薰·1484∼1540)을 소개한 적이 있다. 조광조와 절친했으나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16년 동안 성주, 의주, 안악 등의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다. 그의 부친이 박증영(朴增榮·1464∼1493)이다.

그는 22살 나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오를 정도로 매우 총명했다. 사가독서는 조선시대 때 인재육성 차원에서 젊은 문신들에게 특별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세종 때 처음 도입됐고 신숙주, 성삼문 등이 모두 사가독서 출신이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됐다가 성종 때 다시 부활됐으나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하면서 그 기능이 흡수됐다.

박증영은 29살 나이로 단명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그가 총명함과 더불어 기개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증영이 아뢰기를, "불교는 청정(淸淨)한 것을 종(宗)으로 삼는데 어찌하여 흥판(興販)을 하여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먹을 것이 넉넉한 연후에야 청정한 교(敎)를 닦을 수 있다.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중은 장차 먹지 아니하고 굶어 죽어야 하겠는가.'-<성종실록>

임금이 말하기를, "승인의 흥판(興販)을 금함이 예전에도 있었는가. 중만이 홀로 우리 백성이 아니어서 그 흥판을 금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박증영(朴增榮)은 아뢰기를, "사민(四民)의 밖에 있으며,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없는 자인데 어찌 우리 백성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성종실록>

본문 중 '흥판'은 한꺼번에 많은 물건을 흥정하여 사고파는 일을, '사민'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을 일컫는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간추리면 "왜 불교를 지원하는가"와 "중도 우리 백성 아닌가"로 요약된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성종의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당시는 유교가 국시였음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그 보다는 대화 형식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이곳은 여느 사랑방이 아닌, 어전회의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 박증영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있다.

그는 문장을 떨친 것 외에도 글씨, 서예 그중에도 천보서법(天寶書法)을 잘 썼다고 각종 사료는 적고 있다. 당나라 현종의 재위기간은 흔히 개원(開元)과 천보(天寶)로 나눠진다. 개원은 태평성대를 펼친 시기를, 천보는 양귀비에 빠진 연간을 말한다. 바로 천보서법은 당나라 현종 후기에 유행하던 서체가 된다.

서두에 아들 박훈을 강조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유배생활에서 돌아오자 청원 강외의 모친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러자 그는 부친에 대한 불효를 어머니에 대한 효도로 갚으려 했다.

'(…)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때에 모친이 아직 생존하였는데, 모자간에 오래 헤어져 있던 것을 안타까이 여겨서 (…) 이목(耳目)의 즐거움과 맛 좋은 음식으로 극진히 봉양하였다.'-<기묘록보유>

박증영의 위패가 우리고장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 국계사원에 봉안돼 있다. 그의 후손들(밀양박씨)이 두 부자의 시문을 엮어 목판 눌재강수유고(訥齋江수遺稿·도유형문화재 제 177호)를 제작했으나 책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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