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묘터가 될뻔 하다, 문의 양성산

2011.03.31 18:19:16

조혁연 대기자

지금의 문의는 일개 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문의는 고려시대부터 '현'(懸)의 행정적 지위를 가졌다. 그뒤 여러 차례의 변천을 거쳐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됐으나 1914년 개편 때 청원군 소속이 되면서 '면'(面)이 됐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당시 객사 건물이었던 문산관(文山館·도 유형문화재 제 49호)이다. 문의는 대청호를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는 궁벽하게 인식됐던지 유배지로 자주 이용됐다. 이 부분은 대청호가 없었던 것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

'첨지돈녕부사 안종렴이 숙직에 들어갈 당번날에 처부의 제삿날이라고 거짓 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추핵하니, 종렴이 승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매 항복하므로, 문의현(文義縣)에 부처(付處)하였다.'-<세종실록>

유인숙(柳仁淑·1485∼1545)은 을사사화 때 윤임의 당여(같은 일파)라는 이유로 사사된 인물이다. 이때 희증, 희맹, 희안 등 그의 세 아들도 연좌제에 의해 유배지에서 처형됐다. 이들의 유배지도 문의였다.

그러나 풍수적 의미의 문의는 달랐다.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문의를 풍수상으로 매우 중하게 여겼다. 특히 문의의 진산인 양성산은 명당의 한 곳으로 지목됐다.

조선시대 때는 명산대천에 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가장 큰 제사를 대사(大祀), 그보다 작은 것은 중사(中祀), 소사(小祀)라고 불렀다. 문의 양성산도 그중의 하나였다. 세종 때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 별감의 계본에 의거하여, 악(嶽)·해(海)·독(瀆)·산천의 단묘와 신패(神牌)의 제도를 상정하기를, (…)문의현의 양성(壤城) 묘 위판은 문의군(文義郡) 양성지신(壤城之神)이라 썼는데, 청하건대, 문의군 세 글자를 삭제할 것…'-<세종실록>

인용문에 등장하는 악(嶽)은 바위가 많은 산을, 독(瀆)은 가뭄이 심한 때 제를 올리던 큰 나루나 강을 말한다. 익히 알다시피 사도세자(1735~1762)는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 속에서 비극적으로 죽어갔다. 때문에 정조는 그렇게 죽어간 아버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격정적으로 추념했다.

정조는 영우원(永祐園)을 이장하기로 하고, 그 후보지를 물색했다. 영우원은 경기도 양주에 있던 사도제사를 묘를 말한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아버지의 묘가 너무 좁다고 생각, 이장을 생각했다. 그 후보지의 하나로 문의 양성산도 거론됐다.

'전에 봉표(封標)해 두었던 곳으로 문의 양성산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운운하는 자리이지만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흠이어서 답답하게 막힌 기색을 면하지 못하였고 지질과 물이며 용세(龍勢)도 결코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정조실록>

인용문은 정조가 하는 말이다. 말 대로라면 문의 양성산은 왕가릉의 후보지로 점찍어 뒀으나 당장 사용은 안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좌는 풍수용어로, 북북서 방향을 의미한다.

이처럼 청주시민이 우암산 다음으로 많이 찾는 문의 양성산 줄기 어딘가는 하마터면 사도세자의 묘가 될 뻔 했다. 정상을 북북서 방향에서 등지는 능선이면 대청호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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