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짐승이 맘대로 뛰놀던 곳, 영동 황간

2011.04.05 18:19:17

조혁연 대기자

영남에서 추풍령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만나는 곳이 영동 황간이다.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으로 간주돼 왔다. 황간은 지금은 면(面)이다. 그러나 황간은 한 때를 제외하고 조선시대 내내 줄곧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황간은 지금도 인구수가 적은 편이지만 조선시대 때도 궁벽한 곳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당시 인구가 적었고, 족제비털, 송이같은 토산물이 많이 나왔다. '궁벽'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나 실록에는 자주 등장한다.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는 뜻이다.

'호수가 3백 8호요, 인구가 7백 42명이다. (…) 땅이 메마르며, 기후가 많이 차다.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지초(芝草)·수달피·삵괭이가죽이요,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이다.'-<세종실록지리지>

인용문 중 토공은 해당지역 토산물로 궁궐에 진상하는 것을, 토산은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나 진상 대상은 아닌 품목을 말한다. 황간의 이같은 모습은 중종(16세기) 대에 이르러서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이행(李荇) ·홍언필(洪彦弼)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지리서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왜구)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시대 때 충청좌도였던 충북에는 청주, 충주, 영동, 황간 등 4곳에 읍성이 존재했다. 이중 황간은 서두에 언급한대로 추풍령이라는 큰 고개를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국가 전략성인 중요성 외에 고개 통행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읍성의 존재가 필요했다. 기록상 황간읍성은 왜구의 잦은 출몰에 대응하기 위해 이미 고려말에 성을 쌓기 시작했고, 그후 여러번 보강이 있었다. 조선 중종 때도 방치됐던 읍성을 정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경오년에 지금 공주 목사로 있는 영주(永州) 이언이 전삼사좌윤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監務)가 되어 (…)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 문인들이 황간에 대한 시를 적지 않게 남기고 있다. 재미있는 것으 그 시에 하나같이 '돌'(石)이 표현의 소재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황간은 그만큼 궁벽한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 오지성과 생태성이 큰 자산이 되고 있다.

'이첨(李詹)의 시(詩)에, "온종일 거문고 타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돌밭에 물을 대어 농장이 족하네" 하였다. 고려 이지명(李知命)의 시(詩)에 "여러 봉우리 구름을 받쳐 솟아 있고, 맑은 냇물 돌에 부딪쳐 흐르네" 하였다. (…) 성윤문(成允文)의 시(詩)에, "초가 주막은 산밑에 의지했고, 외로운 성은 돌 머리를 베고 있네"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황간읍성은 구교동 마을 뒤 해발 301m의 산정과 그 남동쪽 능선을 감싸고 설축한 포곡식 석축산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고, 일부 지역에 화강석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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