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의 어려움을 보여주다, 음성 남이

2011.04.21 17:23:38

조혁연 대기자

'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던(死生契闊) / 당신과는 굳게 언약하였지(與子成說) /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執子之手) / 단둘이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與子偕老)'.

중국 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격고'(擊鼓)라는 한시다. 춘추전국시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시에는 고향을 등지고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병사의 애절함이 배여 있다.

이 표현이 국내에 유입돼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과 함께 결혼식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슷한 표현으로는 '살아서는 같은 방을 쓰고(生則同室) / 죽어서는 같은 무덤을 쓰네(死則同穴)'도 있다.

조선시대도 백년해로가 주요 미덕이 됐다. 따라서 평민들의 이혼은 쉽지 않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 질투 등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했을 경우 남편은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다. 이같은 행위를 아내를 버린다는 뜻에서 기처(棄妻) 또는 휴기(休棄)라고 불렀다.

아내가 무척 싫어졌으나 칠거지악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조선시대 남편들은 이때는 아내를 소박(疏薄)했다. 내쫓지 않으면서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 소박당한 아내는 평생 뒷방차지 신세가 되어 첩 주위를 맴도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살아야 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여인네를 '소박데기'라고 얕잡아 불렀다.

그러나 꼭 소박만 있엇던 것은 아니었다.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진 일제 강점기에는 이른바 '내소박'(內疏薄) 사건도 자주 일어났다. 이는 소박의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구박하는 것을 말한다. 아내 옆에 새로운 남자가 생겼을 때 내소박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이혼은 쉽지 않았다. 임금의 윤허(허락)가 있어야 이혼이 비로소 성립됐다. 남이(南怡·1441 ~ 1468) 장군은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白頭山石磨刀盡)'로 시작되는 북정가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기개와 패기가 넘쳤던 인물이다.

그러나 실록 속의 남이장군은 첫번째 아내와의 불화 때문에 변방에서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불화는 중간에 시어머니와 첩까지 끼여있어 복잡성이 더했다.

'공조판서 남이가 상서하기를, "신이 함길도에 정벌하러 나갔을 때에 신의 어미가 질병이 있어, 신이 아내를 보려고 하여 사람을 시켜 불렀는데, 신의 아내가 대답하기를, '천첩을 내친 뒤에야 가서 보겠습니다' 하며, (…) 원컨대 다시 취처(聚妻)하게 하소서" 하니….'-<세조실록>

그러자 세조는 "의리가 칠거지악에 해당하니, 숙계(熟計)하여 임의대로 행하여라"는 말로, 남이 장군의 이혼 요청을 사실상 허락한다. 그러나 당시 사관(史官)은 사론에서 고부간 갈등이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적어 놓았다.

'남이의 어미는 성품이 악독하여 자부(子婦)로 하여금 동침(同枕)하지 못하게 하여, 당시의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임금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세조실록>

유자광 모함에 의해 역적으로 몰린 끝에 능지처참 당한 남이 장군은 우리고장 음성군 감곡면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이와 관련, 음성 서정우 고가가 남이장군 생가터로 알려지고 있으나 분명치는 않다. 남이는 태종의 외손이며 권람의 사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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