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가 빛을 보게 하다, 충주사고

2011.04.26 17:24:26

조혁연 대기자

고려의 말기의 왕으로 '우'와 '창'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호가 주어지 않았다. 왕씨가 아닌 신씨의 씨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때의 신씨는 신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야 쿠데타 명분이 보다 뚜렷해질 수 있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고려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초 정인지 등이 작성했다. 승자의 시각 여부를 떠나 고려사가 없었다면 한국 중세사는 어둠 속에 묻힐 뻔 했다. 고려사가 편찬되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실록을 작성, 보관해 왔다.

그러나 잦은 외침과 내란 등으로 그 보관이 쉽지 않았다. 고려 고종 때 안전한 장소를 물색하던 끝에 합천 해인사에 실록 보관을 위한 외사고를 설치했다. 당시 중앙에 있는 춘추관사고는 내사고, 이를 분산·배치했던 지방사고는 외사고로 불렀다.

그러나 해인사 외사고도 몽고 침략과 왜구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1381년(우왕 7)에 충주 개천사로 옮겨져 약 2년간 머물렀다. 이것은 1383년(우왕 9) 죽주 칠장사로 옮겨가고, 약 7년 뒤인 1390년에는 다시 충주 개천사에 옮겨 약 30년간 존치되다가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졌다.

충주성 내의 사고는 아사(衙舍)인 청녕헌 서쪽 객사 서편에 있었다. 지금의 전신전화국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추정된다. 그 후 1439년부터 전주사고가 새로 지어지는 1473년) 전에 충주사고가 객사의 동남쪽으로 옮겨져 다시 지어졌다.

새로운 사고의 규모와 구조는 아마도 성주사고와 같이 누각의 형태로 지어 사다리로 오르내리도록 했고, 습기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특수 구조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쓰고 있다.

앞선 언급해듯이 고려사는 조선 세종 때 쓰여졌다. 이때 그 기초가 된 것이 바로 충주사고에 보관돼 있었던 역대 고려실록이었다. 만약 충주사고가 훼손이 되었다면 조선초 고려사 편찬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현재와 같은 고려시대의 역사를 알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충주사고에 보관된 의서·병서·농서·음양서 등도 보관돼 있었다. 이는 조선 초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의서를 편찬할 때 귀중한 참고자료로 사용됐다. 역사 기록서를 한곳에만 보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분산 주장이 제기됐다.

"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는데 여년과 섞여 있사오니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조종의 실록과 전조의 사적 및 경서·제자서·경제조장서 몇 본을 만들어 각 도 명산에 나누어 간직하고 해마다 돌려가면서 포쇄하여 불우에 대비하게 하소서"-<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리 요령과 그후의 진행 내용이 실려 있다. '객관의 동남쪽에 있다. 본조의 실록을 간직하여 두고 3년마다 사관을 보내어 포쇄한다. 계사년 가을에 신 희맹을 보내어 충주·성주에 보관하고, 지사 신 양성지를 보내어 전주에 봉안하게 하였다.'

포쇄는 젖거나 축축한 것을 바람에 쐬고 볕에 말리는 것을 말한다. 충주사고는 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내년이 임란이 일어난지 7갑(60x7)이 되는 해다. 조선시대 때는 임란 4,5갑 때 국가에서 큰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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