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의 묘 수난을 자주 당하다, 청원 남일

2011.04.28 17:13:28

조혁연 대기자

고려 태조 왕건은 지방 호족의 세력을 흡수하는 방편으로 성(姓)을 하사했다. 이른바 사성(賜姓) 정책이다. 이와 관련해 평민들에게도 성(姓)에 앞서 본관이 먼저 주어진 경우도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세금과 관련이 있다.

양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면 거주지가 명확하고 고정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면 세금 부과가 쉽지 않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법에 고려 본관제도의 잔상은 남아 있다. 바로 본적란이다. 본적란을 보면 당사자나 그 선대가 어느 곳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평민들은 역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받았다는 것이 된다.

성씨·본관 문화와 관련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는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이때의 삼한은 원삼국 시대의 마한, 변한, 진한이 아닌 신라, 고려, 조선조를 일컫고 있다. 누대에 걸쳐 문벌이 좋은 가문이라는 뜻으로, 달리 의관갑족(衣冠甲族)이라고도 한다.

어느 성씨·본관이 삼한갑족에 속하는지는 주관적인 면이 있다. 이와 관련, 상당수 문중이 자신들의 선조를 아전인수 격으로 삼한갑족에 포함시키고는 한다.

전주이씨를 제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삼한거족이 있다. 바로 청주한씨다. 조선시대 청주한씨 문중에서는 문과 급제자 315명, 상신(相臣·삼정승) 12명, 대제학 1명, 공신 24명과 6명의 왕비가 배출됐다.

청주한씨가 시조로 모시는 인물은 고려 건국 공신인 한란(韓蘭·853~916)이다. 사료를 보면 후삼국시대의 청주에는 궁예 세력이 많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란은 왕건이 청주를 지날 때 그의 군사들은 정중히 맞이했고 또 창고문을 열었다. 이후 한란은 왕건을 종군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한란의 묘가 우리고장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위치하고 있다. 수양대군 세조의 오른팔이었던 한명회가 '청주목'에 묻히고자 했던 것도 시조 한란의 묘가 청주목에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소원대로 한명회는 당시 청주목이었던 지금의 천안시 수신면에 묻히게 된다. 한란의 묘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수난 이후 자주 훼손당했다.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民의 지위가 상승한 결과였다. 관련 내용이 실록에 등장한다. 초토신(草土臣) 한광수(韓光洙)이라는 인물이 상소를 했다.

'중간에 임진병란으로 인하여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게 되자 선산 아래에 사는 백성들이 비갈(碑碣)을 뽑아내고 분묘를 헐고는 함부로 자리를 차지하여 묘를 쓴 것이 부지기수였습니다.'-<고종실록>

초토신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왕년의 왕비 최다 배출 가문'까지 들먹인다. 초토신은 상중(喪中)에 있는 신하를 말한다.

'밝으신 성상께서는 불쌍히 여겨 조령을 내려 장씨 백성의 해괴한 작태를 엄하게 징벌하고 선왕들이 외척을 대우했던 은덕을 잘 본받아 신들이 선영을 보전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매우 간절히 울면서 기원합니다.'-<고종실록>

한란은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40세 무렵에 청주 방서동으로 이주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은 잘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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