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에도 족적을 많이 남기다, 소론 영수 남구만

2011.05.03 17:23:50

조혁연 대기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지은 시조로,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전원생활의 풍류를 즐기며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는 권농(勸農)이지만 농촌의 평화로움도 잘 드러나 있다.

남구만은 목가적 시조를 남긴 것과 달리 정치적으로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송시열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소론의 영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강릉으로 유배됐고, 장희빈에 대한 극형을 반대하다가 완전히 실각·낙향했다.

남구만의 사당과 묘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난히 우리고장 충북에도 많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현종대에 청주목사를 역임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본읍에 두었다가 진휼의 자본에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속오군을 급복하는 일 외에는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현종개수실록>

실록 수정본은 고친 형식에 따라 수정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 등이 있다. 수정실록은 자·구 정도만 수정한 것을, 개수실록은 오류가 발견돼 처음부터 완전히 새롭게 만든 것을 말한다. 반면 보궐정오는 수정한 내용을 부록으로 남긴 것을 말한다. 그가 청주목사 재임 시절에 선정을 베풀었는지 사관(史官)이 이례적으로 그를 호평하고 있다.

'청주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나 북방에 안절하여서도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세상이 바야흐로 붕비하여 서로가 모함과 알력을 일삼았는 데도 남구만은 마음가짐과 주장하는 의논이 항상 공평하고 윤당(允當)하였기 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하는 말이 일어나지 않았다.'-<숙종보궐정오>

남구만은 우리고장 진천도 자주 찾았던 모양이다. 그의 문집인 약천집에 진천을 소재로 한 시가 전해진다.

'/…/ 나약한 성질 예로부터 활줄을 찼다오 / 백성들의 병폐는 단비가 온 뒤에 소생하고 / 봄빛은 나그네 시름 속에 다 보내노라 / 동헌앞의 무성한 나무는 푸른 일산(日傘)을 이루고 / 눈에 비치는 붉은 꽃은 자주색 연기가 덮고 있는 듯 / 흉년든 해 정사는 참으로 어진 수령이 있어야 하니 / 삼년 묵은 약쑥 함께 버리지 마오'-<약천집 1권>

그가 어떤 이유로 진천 객사에 들렸고, 이때 객사에 걸려 있는 퇴도(退陶)의 시를 보고 차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의 퇴도는 퇴계 이황 선생을 말한다.

그의 또 다른 시는 아예 두타산을 직접 거명하고 있다. '두타산의 벼루 작아서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데(陀山石硯小容指) / 글씨 쓰면 먹빛이 구름 같아 붉은빛을 발산하네(潑墨如雲耀紫光) /…/'-<〃>

이상에서 보듯 남구만을 진천을 자주 찾았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진천 초평에는 그의 뒤를 이어 소론을 이끌었던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우거하고 있었다. 최석정도 장희빈이 세자(후에 경종)의 친모인 점을 들어 극형만은 반대했다. 그런 면에서 둘은 나이 차이는 다소 났지만, 거의 사상적 동지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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