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水仙'이 됐을까, 괴산 청안 박지화

2011.05.22 17:23:41

조혁연 대기자

기수학(氣數學)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술학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기수학자로는 명종 때 인물인 박지화(朴枝華·1513∼1592)가 꼽히고 있다.

그는 벼슬이 이문학관(吏文學官)에 이르렀다. 이문학관은 승정원 소속으로, 중국 외교문서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그는 서자 출신으로, 승진에 한계가 있었다.

그는 명산을 유람했고, 특히 금강산에 들어가 7년간 수도했다. 이수광은 이런 그를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그는 밥을 먹지 않고 솔잎과 소나무 껍질만 먹었으며, 엄동설한에도 무명옷을 입고 지냈다'고 적었다.

그렇다고 그가 도인의 모습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보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다음은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이 지인 박인수(朴仁壽·1521∼1592)가 박지화에 감화되는 모습을 적어 놓은 내용이다.

'그러다가 수암 박지화를 만나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들었고(…). 이로부터 도의 진수에 깊이 맛들여서 평소에 방 하나를 말끔히 정돈하여 왼편에는 거문고, 오른편에 책을 놓아두고 거처하였으며 세간의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상촌집>

본문중 '위기지학'은 타인을 위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인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표현이다. 논어헌문(論語憲問)에 '옛날의 학자는 자신을 위했는데 오늘날의 학자는 남을 위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같은 시기 최립(崔山+立·1539~1612)이 지은 간이집에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박지화의 모습이 등장한다 .

'수암 박지화가 청연(淸淵)의 오촌(烏村)에 우거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나아가서 논어에 대해 질의하였는데, 의심할 만한 곳을 의심하고 질문할 만한 곳을 제대로 질문하면서 확실히 알 때까지 포기하지 않자, 수암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면서, "우리 수재(秀才)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간이집>

인용문 중 청연(淸淵)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괴산 청안(淸安)의 옛 이름이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또 주역의 내용을 해설하고 학습 방법을 제시한 여이노선서(與李老仙書)를 쓰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은 예언자답게 드라마틱한 면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친구 정굉(鄭宏)과 함께 포천(춘천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피난갔고, 왜적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시 한 수를 남기고 스스로 물속에 빠져 죽었다. 시신은 벗 정굉이 거두었다.

'서울은 저멀리 구름낀 산 밖에 있는데 / 소식 잠잠하여 이르지 않는구나 / 정신적으로 사귀던 글 짓던 나그네는 / 힘이 다하여 고향 누대를 바라보네 / 쇠약하고 병들어 강변에 누우니 / 친한 벗이 해질무렵에 돌아오는구나 / 갈매기는 원래 물에서 자니 / 무슨 일로 남은 슬픔이 있겠는가.'

운수가들은 이런 그를 두고 지금도 "시해(尸解) 후 수선(水仙)이 됐다"고 말하고 있다. 시해는 몸에서 혼백이 빠져나가서 신선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위패가 봉안된 구암서원(龜巖書院)이 광해군 때 청안 석곡리에 세워졌다. 이후 1955년에 청주시 분평동 251-5 뒷산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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