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로 전리방귀를 당하다, 한준겸

2011.06.02 18:40:51

조혁연 대기자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다. 게다가 분조(分朝)의 경험까지 있어, 그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은 당연시 됐다. 선조의 분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신의 유고를 대비해 그렇게 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조 자신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설이다.

임진왜란이 종전되자 광해군의 왕위계승 환경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이와 같았다.

선조는 광해군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이 제거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불안감은 증오심으로 발전했다. 선조는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고 할 정도로 광해군에게 악감정을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하자 선조는 바로 후처를 맞이했다. 그가 바로 인목황후 김씨였다. 이때 선조의 나이 50세, 인목황후는 19살이었다.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분격적으로 불거졌다. 얼마안가 선조는 병이 위독하자 영창대군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다.

선조는 신임하던 일곱 신하에게 영창군의 뒤를 유명(遺命)으로 부탁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유영경, 한응인, 박동량,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등이다.

유교칠신 중에 한준겸(韓浚謙·1557~1627)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그가 유교칠신이 된 것은 시련이자 고행의 시작이었다.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광해군이 집권했다. 광해군은 자신의 집권을 반대한 인물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교칠신은 첫번째 표적이 됐다. 함경도 감사로 나가있던 한준겸도 공초를 위해 소환 됐다.

"무신년 2월에 신이 평양 감사의 임소(任所)에 있을 때 서울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말을 전하기를 '선왕께서 승하하실 때 유교(遺敎)를 내리셨다' 하면서 재신 6, 7명 중에 신의 이름도 말단에 끼어 있다고 하기에 신이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지면서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광해군일기>

한준겸의 진술대로라면 자신은 사전에 유교칠신이 된 사실을 몰랐고, 또 원하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 진술은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한준겸은 전리방귀(田里放歸)을 당했다. 전리방귀는 형벌의 한 가지로서 벼슬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는 것을 말한다. 그가 내쫓긴 지역이 우리고장 충주였다.

그는 1617년부터 여주로 양이(量移)된 1621년까지 4년간 충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양이는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가 죽자 당시 사관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청주인(淸州人)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기량이 넓으므로 일찍부터 공보의 촉망을 지니고 있었다. (…) 외직으로 나가거나 내직으로 들어오거나 근면하였고 사방에 힘을 다했으므로 크게 사민(士民)들의 마음을 얻었다.'-<인조실록>

그리고 졸기의 말미를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어서는 더욱 근신하였는데,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고 적었다. 그는 인조비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친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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