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에 구원병을 요청하다, 충주 유몽정

2011.06.09 18:48:29

조혁연 대기자

임진왜란이 끝나자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을 선발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문신에게 내린 훈호(勳號)를 지칭한다.

무신에게는 선무공신이라는 훈호가 주어졌다. 호성공신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났다. 1등에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崑壽) 등 2명이 선발됐지만 나머지 등급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 대상이 됐던 인물은 정운, 이희득, 심희수, 유몽정등 4인이었다. 특히 심희수와 유몽정은 역할이 비슷, 공신 포함 여부를 놓고 삼정승들이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흔적이 실록에 나타난다.

'만일 심희수을 녹공할 경우에 유몽정(柳夢鼎)은 임진년의 성절사로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행행할 적에 뒤따라갔고, 북경에 도착해서는 정문(呈文)하여 위급을 상고(上告)하는 노고가 있었으니, 유몽정만 유독 빠지게 된다면 미안스러울 듯합니다.'-<광해군일기>

파문이 가라앉은 후 유몽정 아들 '영'이라는 인물이 "아버지가 공신에 선정되지 않은 것은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는 유몽정이 호성공신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실제 호성공신 최종 명단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당시 조정도 "안타깝게 됐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유영(아들 지칭)이 상소한 사실은 모두 진실하여 허위가 없습니다. 그가 녹공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처음 훈공을 의논할 때도 유몽정에게 공적이 있음을 알았으나,특별히 끝까지 호종하여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만을 취하였기 때문에 이 사람이 정규의 밖으로 탈락된 것이지…'-<광해군일기>

실록 내용대로라면 유몽정은 처음에는 선조를 호종했으나, 중도에 다른 임무 때문에 호종단에서 빠진 것이 된다. 그에게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가는 성절사의 임무가 다시 주어졌다.

성절사는 본래 조선시대에 중국의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보내던 사신을 의미했다. 그러나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만큼 그에게 구원병 요청 임무도 함께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절사(聖節使) 유몽정이 먼저 떠났다. 몽정이 성절사로 임명되어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상(선조 지칭)이 출행하였으므로 몽정은 단지 표문과 자문을 가지고….'-<선조수정실록>

유몽정은 명군의 임진왜란 참전을 성사시켰다. 그는 그러나 관리생활 초기에는 행정처리가 미숙했는지 파직된 적이 있다. 활을 잘 쏘지 못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영암군수 유몽정은 활을 잡지도 못하니 문관으로서 무략(武略)이 있는 자를 차송하게 하소서. 전라 감사 손식은 속병이 있어서 혹 사변이 생길 경우 반드시 이에 대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체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유몽정은 아뢴 대로 하고…."-<선조수정실록>

그러나 그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임무를 완수했다. 그는 귀국후 얼마 안돼 병사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으로, 묘소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동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김유가 지은 비갈(碑碣)도 존재한다. 노은은 민족시인으로 불러주기를 원하는 신경림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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