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년전 단양사람, 어떻게 살았을까

2011.06.20 12:37:21

조혁연 대기자

상소문(上疏文)은 신하가 국왕에게 올리는 글로, 봉장(封章), 주소(奏疏), 진소(陳疏)라고도 한다. 국가 최고 권력자에게 올리는 글인 만큼 어느 정도 서식을 갖추어야 했다. 겉봉투에는 '上前開折(상전개절)', 또 뒷면은 이어 붙인다는 의미로 '臣署名(신서명)'이라고 표시했다.

조선 명종대 우리고장 단양군수를 지낸 인물로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있다. 이황의 제자였던 그는 단양군수로 재직하던 1557년 명종 임금에게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린다.

16세기 후반이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년전이다. 따라서 상소문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당시 단양 사람들의 생활상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단양은 궁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해 상소문을 읽는 사람의 코끝을 찡하게 한다.

상소문은 '신은 장구(章句)나 아는 보잘것없는 유자(儒者)로서 경세(經世)하는 재주가 없는데 외람되이 군수의 책임을 맡았으니 잔폐된 고을을 정상으로 회복시키는 책임이 중합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우거진 잡초와 험한 바위 사이에 있는 마을 집들은 모두 나무 껍질로 기와를 대신하고 띠풀을 엮어 벽을 삼았으며 전지는 본래 척박해서 수재와 한재가 제일 먼저 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항산(恒産)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명종실록>

인용문 중 '항산'은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재산이나 생업을 의미하고 있다. 고을 사정이 이렇다보니 '유랑민'이 자주 언급된다.

'그래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는 실정이고 흉년이 들면 도토리를 주워모아야 연명할 수가 있습니다. (…) 가난한 자는 이미 곤궁해지고 곤궁한 자는 이미 병들어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갔습니다.'-<명종실록>

급기야 황준량은 '선한 것만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이고 어진 마음 그것만으로는 저절로 행해지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비상한 방도가 있어야 다 끊어져가는 형세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구체적으로 10가지를 언급한다.

그 10가지는 재목(材木), 종이의 공납, 산행(山行), 야장(冶匠), 악공(樂工), 보병(步兵), 기인(其人), 피물(皮物), 이정(移定), 약재(藥材) 등에 관한 것이었다. 5백년전 표현이라 다소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산행은 사냥, 기인은 향리의 자제, 이정은 이주(移住)의 뜻을 각각 의미한다.

상소문 중 일부를 소개하면, '거만(巨萬)의 재목을 가지고 험한 산을 넘고 깊은 골짝을 건너 운반하자면 남녀가 모두 기진 맥진하고 소와 말도 따라서 죽게 되어 온 고을의 농가에 수십 마리의 가축도 없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상소문은 자칫 임금의 노여움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명종은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답하기를, "이제 상소 내용을 보건대 10개 조항의 폐단을 진달하여 논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명종실록>

단양군 백성들은 황준량 상소로 인해 세금을 10년 동안 덜 낼 수 있었다.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에 그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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