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덩이 맑은 얼음같다, 충주 박순

2011.06.26 16:51:00

조혁연 대기자

전회에 칠서(七庶·일명 강변칠우) 사건을 언급한 바 있다. 말 그대로 7명의 서자들이라는 뜻으로, 박응서·김평손·심우영·서양갑·박치의·박치인·이경준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자차별에 불만을 품고 모반을 기도했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 이 사건은 조작 여부를 떠나 광해군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옥사로 이어졌다. 이른바 계축옥사다.

당시 역모를 도모했다고 진술한 인물은 박응서라고 밝힌 바 있다. 그도 서자의 서러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의 씨앗이 된 친부는 우리고장 충주 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1523∼1589)이다. 함흥차사로 유명한 박순과 한자가 같다. 그러나 함흥차사의 박순은 음성, 오늘 소개하는 박순은 충주 출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영의정 박순은 칠서사건으로 인해 결국 서자 박응서를 잃게 된다. 박응서는 진술의 댓가로 처음에는 잘 나갔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박순이 첩을 얻게 된 사연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 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말이 15년이지 일국의 재상 자리에 15년간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덕, 행정적으로 매우 유능한 관료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도 첩얻는 관습을 그대로 답습했고, 이것이 자식을 잃는 불행으로 이어졌다. 고려말부터는 일부다체제가 허용됐다. 이때 시골에 있는 정처는 향처(鄕妻), 서울서 새로 얻은 부인은 경처(京妻)라고 불렀다.

정황상 박순도 이같은 시대적 흐름속에서 경처를 얻었고, 이때 서자 박응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순은 앞서 언급했듯이 일국의 재상을 15년 동안 역임할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특히 박순은 대유학자 이황으로부터 칭찬을 자주 들었다.

'박순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하여 마음이 평탄하고 화평하여 남과 대립이 없었다. 일찍부터 서경덕(徐敬德)에게 수학(受學)하고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신혼(神魂)이 아주 상쾌하다" 하였다.'-<선조수정실록>

일부 사가들이 쓰는 용어 중에 '충주사림'이라는 표현이 있다. 박순은 이 학파의 막내쯤 된다. 이때 조정에는 마침 충주인 노수신(盧守愼·1515 ~ 1590)이 진출해 있으면서 둘은 정국을 주도했다.

'명종 말년에 다시 발탁 기용되어 두 권신(權臣)을 탄핵하여 내치니, 사론(士論)이 비로소 신장되고 조정이 엄숙하여져 선류(善類)의 종주가 되었다. 노수신과 함께 정승이 되어 정승의 자리에 있은 것이 14년이나 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선조수정실록>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안에 동향 인물이 2명이나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다. 바로 이때가 충주사림의 전성기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권신'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궁궐을 피바다로 만든 간신 윤원형 등을 말한다. 실록 박순 졸기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물러나서도 오히려 상(선조 지칭)의 권념(眷念)이 쇠하지 않았다.' 임금이 물러난 신하를 계속 생각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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