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장안면과 금속활자 장인 이천

2011.06.28 14:49:40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과학사를 논할 때 좌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장영실(蔣英實·?~?)과 이천(1376∼1451)일 것이다. 일반인들은 두 사람 중 장영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 유명한 자격루(1434)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든 자격루는 일종의 자동 시보장치로,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을 상징했다. 장영실은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했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또 다른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만들기도 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천도 천문기구, 금속활자, 화약무기 등의 분야에서 장영실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사학자들은 이중 금속활자 개량을 이천의 최고 업적으로 치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조선시대들어 외형상 반쪽만 계승된다. 금속활자를 만드는 것이 워낙 힘들다 보니 사대부 집안과 사찰에서는 목판으로 문집과 경전 등을 간행했다. 목판본이 많이 현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조선 조정은 고려 금속활자를 계승, 성능 개량을 꾸준히 시도했다. 그 결과, 조선초기의 금속활자는 시간적으로 계미자(태종), 경자자(세종), 갑인자(〃) 순으로 개량됐다. 바로 이천이 경자자와 갑인자 개량을 주도했다.

계미자는 직지를 만든 금속활자보다 다소 개량됐으나 활자의 크기와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고, 또 글자 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천이 이를 개량, 경자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처음 만든 글자는 모양이 다 잘 되지 못하여, 책을 박는 사람이 그 성공(成功)이 쉽지 않음을 병되게 여기더니, 영락 경자년 겨울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이를 신념(宸念)하사 공조 참판 이천에게 명하여 새로 글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시니, 매우 정교(精巧)하고 치밀하였다."-<세종실록>

인용문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세종이 매우 흡족해 했다. 그러나 경자자도 얼마안가 옆줄이 일직선을 이루지 못하는 등 문제점이 노출됐다. 이를 기술적으로 보완한 것이 갑인자이고, 역시 이천이 이 작업을 주도했다.

갑인자는 글자체가 매우 반듯하고 인쇄 상태도 매우 깨끗하게 나타나는 등 지금도 조선시대 최고의 금속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경자자를 만들 때보다 훨씬 만족해 했다.

"내(세종대왕)가 이 폐단을 생각하여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板)을 만들고 주자(鑄字)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세종실록>

이천은 예안(지금의 안동) 사람이다. 그러나 그를 추모하는 전각인 추원각(追遠閣)이 우리고장 보은군 장안면에 존재한다. 기묘사화 때 이곳에 은거하기 시작한 보은의 예안이씨 후손들은 이천 실기비(實記碑)와 세종의 유서(諭書)를 판각한 목각판을 보호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 추원각을 건립했다.

실기비는 사실을 기록한 것을, 유서는 임금의 명령서를 일컫는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왜 지금까지 추원각을 주목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추원각을 연계해 금속활자 답사코스로 개발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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