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누름'의 역모? 충주 이정랑

2011.07.05 16:46:04

조혁연 대기자

1545년(명종 즉위년) 소윤 윤원형이 대윤 윤임 일파를 공격하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충주인 이약빙도 이 사건에 연루돼 사사됐고, 그의 아들 이홍남(李洪男·1515 ~?)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이홍남은 유배지에서 빨리 풀려나기 위해 '이홍윤(동생)이 배광의, 김의순 등과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고변 편지를 승정원에 접수했다. 전회에도 언급한 이른바 이홍윤 역모사건이다. 이홍남, 홍윤 형제는 재산다툼으로 사이가 극히 안 좋은 터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역모사건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했다. 3일 뒤 풍성부원군 이기, 좌의정 황헌, 좌승지 정언각 등으로 국청(鞫廳)이 구성됐다. 국청은 조선시대에 역적 등 나라의 큰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 왕명으로 설치하는 임시관청을 일컫는다. 다음은 국청에서 작성한 심문 내용이다.

"이홍윤을 형신할 때 무송수 이언성과 모산수 이정랑이 그 초사에서 나왔으니 잡아다 추문하게 하소서. 또 모의책(謀議冊)이 충주 본가에 있다고 하여 먼저 간 도사(都事)로 하여금 가지고 오도록 하였으나 틀림없이 가지고 올지는 기필하기 어려우므로 다시 이홍윤으로 하여금 대체적인 것을 적게 하여 입계합니다."-<명종실록>

인용문 중에 모산수 이정랑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종실로 정종의 후손이다. 그가 어떤 이유로 충주에 정착했고, 또 이번 사건에 포섭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후속 글에는 '모산수(毛山守)는 종실 중에서 장자이니 그를 무송수(茂松守)의 후속으로 삼고…'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로 미뤄 주동자급은 아니었던 같다. 혹독한 고문과 함께 심문이 시작됐고, 모산수는 관련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김의순을 1차 형문하였는데 지난번 공초와 가감이 없었다. 모산 이정랑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신은 늙었고 이홍윤은 젊으므로 전혀 교분이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4∼5년 전에 충주에 사는 서재종매부(庶再從妹夫·육촌누이남편) 집에서 상면했을 뿐입니다."'-<명종실록>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되레 이후정이라는 인물이 "10월 15일에 상경하여 마치 고변하는 것처럼 하면서 거사하기로 하자고 하였으나, 마침 약속한 사람이 모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보리누름으로 기약하였습니다"(〃)라고 정반대의 진술을 했다.

이 긴박한 와중에 '보리누름'이라는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했다. 글자 그대로 보리가 누렇게 익을 무렵이라는 뜻이다. 왕족 모산수는 을사사화가 일어난지 4년만에 처형됐다.

그의 사위가 토정비결로 유명항 이지함이다. 토정은 장가든 후 얼마간은 처가가 있는 충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처가의 화를 예견했는지 그 직전 충주를 떠나 고향 충남 보령으로 돌아간 것으로 돼 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하루는 그 부친에게 고하기를,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솔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모산수 집에 화가 일어났다."-<선조수정실록>

훗날 밝혀졌지만 인용문에 등장했던 '모의책'은 역모 참여자 명단이 아닌, 이른바 계모임 명단이었다. 이홍남은 이 사건후 출세의 길을 달렸으나 선조 때 동생을 무고한 것이 탄로나면서 관직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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