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四富의 소리를 듣다, 충주 박종우

2011.07.14 16:11:44

조혁연 대기자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단종실록>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에게 어린 왕자(단종)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기회를 틈타 수양대군은 1453년 한명회 등 권력에서 소외돼 있던 자들을 포섭, 원로대신을 무력으로 공격·살해했다. 바로 계유정란이다. 세조의 역사는 이들을 정난공신이라고 적었다. '정난'(靖難)은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정난의 공을 논하여 세조(수양대군 지칭)·정인지·한확·박종우·김효성·이사철·이계전·박중손·최항·홍달손·권남·한명회를 1등으로 삼고…<단종실록>

인용문 중 박종우(朴從愚··∼1464)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후 평안도 도체찰사로 나가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도체찰사는 왕명에 따라 민정을 총괄적으로 살펴보는 직책으로 정1품의 품계를 지녔다.

박종우의 간접적인 유품인 완문, 계하사목,교첩 등이 우리고장 충주의 운봉박씨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완문은 충훈부에서 내린 것으로, 정난공신 박종우의 공적을 인정하고 박흥래가 그 자손임을 확인하는 문서다.

계하사목은 충훈부에서 매 식년(式年·3년)마다 공신의 자손을 기록하여 배포하는 책자이다. 그 안에는 박흥래가 세조 때의 정난공신 박종우의 자손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박종우의 후손인 박흥래는 1834~1894년의 생몰 연대를 지니고 있다.

이후 이들 전적류는 종손인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온수골의 박진홍 씨에게 전해졌고, 그는 지난 1892년 일대에 탄약창이 들어서면서 인근 내용 마을로 이사해 살다가 2007년 작고했다.

현재 운봉박씨 가승(家乘) 전적류의 최종 보관자는 박진홍의 아들인 성모씨라고 충주지역 향토사료는 적고 있다. 이처럼 운봉박씨 충주파가 가승 전적류에 애착을 보이는 것은 나름의 이유도 있어 보인다.

밀양박씨의 한 분파로 알려진 운봉박씨는 고려말 도첨의찬성사를 지낸 박중화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의 현손(고손)이 바로 박종우로 태종의 서녀에게 장가갔다.

그러나 운봉박씨는 현재 문중세가 다소 위축된 편으로 지난 2천년 조사 때 전국적으로 4백여 가구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운봉은 지금의 남원시 안에 위치한다. 이 대목에서 당시 사관이 박종우의 일생을 어떻게 썼는지 궁금해 진다.

'박종우는 성질이 어질고 후하고 너그럽고 커서 대신의 풍모가 있었고, 몸을 가지는 데 삼가고 집에 있을 때에도 근엄하였고,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할 때, 자리가 높았으나 더욱 겸손하였다.'-<세조실록>

상당히 후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의 내용은 약간 다르다. '四富'와 '집안이 대대로 부호여서'를 동시에 표현,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집안이 대대로 부호(富豪)여서 윤사로·윤사윤·정인지와 같이 재물을 모은 것은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4부(四富)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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