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귀양지 유해를 수습하다, 보은 최운

2011.07.26 17:31:57

조혁연 대기자

우리고장 제천 인물인 김식(金湜·1482~1520)은 조선시대 최장거리 도망자로 유명하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식은 단지 조광조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야 했다.

처음에 외딴섬으로 유배되는 절도안치(絶島安置) 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도움으로 형량이 감경, 경북 선산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나 유배기간 중 신사무옥이 일어나면서 그에게 진짜 절도안치 형이 떨어졌다. 그는 형량이 지극히 부당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최운은 거제도로 이배되기 직전 탈출을 감행했다.

고된 행로가 시작됐다. 김식은 경북 선산에서 동쪽으로 지리산 부근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김식은 도망자 생활에서 오는 육체·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유숙할 곳이 없어 산골짜기를 경유하여 지리산에 가려고 거창현 수도산 남쪽에 이르렀는데 밥을 먹지 못한 지가 수일이었다. 하루는 고제원(高梯院) 동북편 산기슭에 머물면서 고사리를 캐어다가 먹으려고 우음산을 시켜 마을 집에서 불을 구해 오라고 보낸 후 드디어 스스로 목을 맸다. 경진년 5월 16일이었다.'-<기묘록보유>

앞서 김식은 도망자 생활 중에 자기를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가는 친구 이름을 거명했고, 이를 이윤검(李允儉)이라는 인물이 관에 일러 바쳤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건이 터질 경우 '공범자'로 분류되기 십상이다.

'12월에 파직되어 고향에 근신하고 있었는데 경진년에 이신(李信)의 고사에, "김대사성(김식 지칭)이 망명 중에 있을 때, '나를 받아줄 사람은 최운과 영해 부사(寧海府使) 이윤검(李允儉)뿐이다.' 말한 바 있다" 하였으므로…'-<〃>

인용문 중에 최운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결국 그도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전 가족과 함께 평안도 강계(江界)로 추방된 끝에 그곳에서 죽었다. 기묘록보유는 이에 대해 '죄가 풀리자 그의 아내가 뼈를 가지고 돌아와 고향에 장사지냈다'고 적었다.

최운은 지금의 연기군 전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우리 고장을 무대로 활동을 많이 했다. 그는 황간현감을 역임했다. 또 그는 보은 인물 김정과 절친한 사이였고, 그 김정은 조광조의 사상적 동지였다. 이 때문인지 그의 위패가 보은군 삼승면의 금화서원(金華書院)에 배향돼 있다.

금화서원은 1758년 보은지역 유생 강재문 등 105인이 발기하여 세운 서원으로, 최운 외에 성운·조식·성제원·최흥림 등을 추모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에 훼철됐으나 광복후 보은지역 유림회의 노력으로 1967년에 복원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와 3칸의 강당, 5칸의 관리사 등이 있다. 최운은 제천 청풍에도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가 귀양가지 전 청풍 한벽루를 찾았다. 한벽루에서 벗을 마중하는 시다.

'머나먼 타관 길에(萬里關河路) / 나그네의 외로운 모습이여(羈危隻影微) / 바람은 성긴 버들 언덕에 많고(風多疎柳岸) / 낙엽은 늦은 산 석양빛에 떨어진다(葉落晩山暉) / 내 마음 산수에 쏠려 있고(山水情都在) / 저 일은 존망이 다 틀렸네(存亡事已違) / 고향이 이제 멀지 않으니(故園今不遠) / 행여나 더디 돌아갈까 저어하노라(錯莫欲遲歸)'-<기묘록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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