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 비밀을 지키다, 충청감사 신개

2011.08.11 16:37:42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사관(史官)은 매일 임금의 거둥이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기록했다. 바로 사초(史草)다. 사관들은 이 사초를 매달마다 1책 혹은 2책으로 묶었고, 그해 마지막 달에 왕에게 책수만을 보고했다. 이렇게 사초가 책으로 묶어진 것은 시정기(時政記)라고 불렀다.

비밀을 생명으로 하는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는데 기초사료로 사용됐다. 종이는 펄프가 나오기 전까지 귀한 존재였다. 조선시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록이 편찬돼 제구실이 끝난 사초는 세초(洗草)라고 해서 물에 빨아 먹물을 뺀 후 다시 사용됐다.

조선시대 모든 왕들은 사초를 보고 싶어했다. 우리나라 역대왕 중 최고의 성군은 단연 세종대왕이다. 그는 인품이나 능력면에서 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인간인 이상 사초를 무척 보고 싶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자 당시 몇몇 대신들이 "어떠한 경우든 사초만은 안된다"고 버텼고, 세종은 짜증섞인 반응을 보인다.

"지금 친히 관람하고자 하는 것은 착하고 악한 행실의 자취를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임신년의 왕위에 오를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의 몰래 서로 이야기한 말을 대부분 사신(史臣)이 알지 못한 것이 많다. (…) 사신이 어찌 능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이야기한 말을 다 알겠는가."-<세종실록>

요약하면, '사관이 어찌 모든 것을 속속들이 정확히 알 수 있는가'라는 뜻이다. 당시 대신 중에는 신개(1374∼1446)라는 인물이 있다. 결국 임금과 신개가 중심이 된 대신간의 사초 대결을 원칙과 명분의 승리로 끝났다.

'대신 황희·신개 등이 말하기를. "(…)조종의 사기는 비록 당대는 아니나 편수한 신하는 지금도 모두 있는데, 만약 전하께서 실록을 보신다는 것을 들으면 마음이 반드시 편하지 못할 것이니, 신 등도 또한 타당하지 못하다고 여립니다" 하니, 임금도 마침내 보지 아니하였다."-<세종실록>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으로 둘다 승리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사가들은 조선왕조가 5백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기록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중국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5백년 동안 유지된 왕조는 하나도 없다.

당·명·청조가 비교적 길었지만 3백년을 넘지 못한다. 중국 역대 왕조는 전쟁과 북방민족 남하 그리고 비폭력 수단의 일종인 '선양'에 의해 수시로 왕조가 교체됐다. 이중 전쟁에 의한 정권교체는 마상득천하(馬上得天下)라고 불렀다. 달리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는 뜻으로, 전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거란족이 요나라, 여진족이 금나라, 만주족이 청나라를 건국한 경우는 북방민족의 남하에 해당한다. 선양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찬탈이 많았다.

신개는 태종 연간에 우리고장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태종도 온천욕을 좋아했던 임금 중의 한 명이다. 신개는 충청도관찰사(감사)로 있으면서 이른바 '온천출장'을 자주 가야했다.

'대가(大駕)가 충청도 직산현 홍경원평(弘慶院坪)에 머물렀다. 도관찰사 신개와 도절제사 유습이 행궁으로 나아와 기거하였다.-<태종실록> 인용문에 등장하는 홍경원평은 지금의 직산읍 일대를 말한다. 당시 직산현은 청주목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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