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아들 醫書를 쓰다, 음성 김문

2011.08.23 18:16:41

조혁연 대기자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椒水里)에 거동하시는 데도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세종실록>

그 유명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1445)의 상소문이다. 요약하면, "왜 초정에까지 와서 한글창제 작업에 급급하십니까" 정도가 된다. 현재 초정약수에는 세종대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바로 '어찌 이것만은 행재(行在·초정약수 지칭)에서 급급하게 하시어'라는 구절이 동상 설립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최만리 상소문은 그가 혼자 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실록의 서두에는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이라는 복수의 표현이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상소에 동참했던 나머지 이름들이 세종에 의해 하나씩 거명된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세종실록>

실록의 행간을 보면 세종은 지극히 논리적인 성격으로 화를 좀처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이날 만큼은 닥달하는 대신들이 너무 서운했는지 이들을 의금부 옥에 하룻동안 가두라는 명령을 내린다. 일종의 감치명령이다.

앞의 인용문 중에 김문(金汶·?∼1448)이라는 인물의 이름이 보인다. 그의 출생 환경은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당이었다.

'문(汶)의 자(字)는 윤보(潤甫)인데, 세계(世系)가 본디 한미(寒微)하여,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어머니가 무당노릇을 하여 감악사(紺嶽祠)에서 먹고 지냈다"고 하였다.'-<세종실록>

그는 비록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 1420년(세종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후 문명(文名)으로 집현전 직제학까지 승진하는 것으로 사료에 나타난다.

이것 만이 아니다. 그는 다재다능 해 세종의 명에 의해 그 유명한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쓰게 된다. 의방유취는 한방의학 백과사전으로 그 양이 방대하다. 따라서 의술을 수집하는 임무와 이를 문장으로 옮기는 업무가 나눠서 진행됐다. 김문은 이중 후자의 편찬 업무를 맡았다.

'집현전 직제학 김문·신석조, 부교리 이예, 승문원교리 김수온에게 명하여 의관 전순의·최윤·김유지 등을 모아서 편집하게 하고, (…) 3년을 거쳐 완성하였으니, 무릇 3백 65권이었다. 이름을 의방유취라고 하사하였다.'-<세종실록>

의방유취가 우리고장 음성군 대소면 대풍리의 한독의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소장본은 1477년(성종 8) 을해자 금속활자로 다시 찍어낸 총 266권 264책 가운데 일부로, 지난 1994년 보물 제1234호로 지정됐다.

세종 때 찍은 원간본은 임진왜란 때인 1592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의 손으로 들어간 후 현재까지도 일본 궁내성 도서료(宮內省圖書寮)에 남아 있다. 가토은 임란 때 함경도까지 진출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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