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금천창을 논하다, 물류 전문가 이응

2011.09.06 18:33:03

조혁연 대기자

마패(馬牌)는 중앙 벼슬아치가 공적인 업무로 지방 출장을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징표를 말한다. 한쪽 면에 연호·연월일과 '상서원인(尙瑞院印)', 또 다른 면에는 가용할 수 있는 말의 수를 새겼다.

상서원은 옥새와 병부 등 여러가지 패를 관리하던 곳으로 6부 중 이조에 속했다. 암행어사와 마패는 눈익은 조합이다. 역졸이 마패를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치는 모습이 사극에 심심찮게 등장한다. 조선시대 마패법 실시를 처음 건의한 인물은 이응(李膺·1365∼1414)이다.

'마패법을 세워 아뢰었다. 병조 판서 이응이 아뢰었다. "처음에 마패를 상서사(尙瑞司)에 속하게 하여 이를 무겁게 하였으나, 이제 정부에서 포마(鋪馬)를 발하는데…."'-<태종실록>

그는 장수하지 못하고 50나이에 졸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유난히 길(路)과 관련된 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마패가 땅길에 관련된 것이라면, 세곡(稅穀) 운반은 물길과 관련이 깊다.

실록에는 이응이 물길과 세곡을 함께 언급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경상도 세곡을 남해, 서해 등을 거치는 해로 운송을 택했다.

예나 지금이나 해로 운송은 거센 바람이 문제가 된다. 경상도의 조운선 34척이 바다에서 침몰되는 사고가 1403년에 일어났다. 태종과 이응이 육로와 해로 운반 중 어느 것이 안전한가를 둘러싸고 대화를 나눈다.

'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육로(陸路)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마(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태종실록>

태종의 의견이 최종적으로 채택됐다. 이때부터 경상도 세곡은 바닷길이 아닌 백두대간을 넘어 충주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충주 계립령이 아닌, 조령(일명 문경새재)으로 운송됐다.

계립령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반면, 조령은 사람과 물산의 이동이 크게증가했다. 더불어 세곡의 중간 저류지인 충주 금천창도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서울 경창으로 운송할 세곡이 늘어나자 이번에는 이를 임시 보관하기 위한 창고시설이 문제가 됐다. 저장 능력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종과 이응 사이에 물류창고 확장 여부를 둘러싸고 다시 논리 대결이 일어난다. 특히 한겨울 건축공사가 문제가 됐다.

'임금이 말하였다. "날씨가 추워지니, 3백 간을 짓자면 반드시 얼어죽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경상도 군자(軍資)가 많지 않으니, 정부(政府)의 의논이 그르다."'-<〃>

이응이 이에 대해 "충주 강가에 3백 간을 짓고 남는 나무는 서울 안에 수운하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말하나 태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대신 태종은 "대한(大寒)이 오기 전에 빨리 동원된 일꾼들을 풀어주라"고 명하면서 논쟁이 마무리 됐다.

실록 이응 졸기는 이에 대해 '성질이 굳세고 사납고 고항(高抗·꼿꼿함) 하여 이론(異論)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다. 강군(强君) 밑에 강신(强臣)이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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