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다니니 竹葉이 되다, 음성 채무일

2011.09.25 16:14:12

조혁연 대기자

얼마전 우리고장 음성 인물 채수(蔡壽·1449~1515)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연산군 시절을 산 인물이다. 연산군이 보위에 오른지 5년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채수는 이때 정희대비(세조의 비)가 폐비윤씨에 대해 적은 글을 사관에게 넘겨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극형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곤장 70대만 맞고 풀려난다.

이때 실록에 우리고장 지명이 어느 때보다 많이 등장한다. 누가 "기생을 데려다 잔치를 했다"고 고변을 한 모양이다.

'신이 먼저 충주에 가서 기다리자 아비가 또한 뒤따라 왔었습니다. 단지 하룻밤을 자고서 이튿날 신이 먼저 떠나 안부역(安富驛)에 이르고 아비가 뒤에 왔는데, 충주의 수령이 잠시 전별만 했을 뿐이고 기생을 데리고 잔치를 하느라 오래 머무르며 폐단을 만든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성종실록> 안부역은 지금의 수안보 일대를 말한다.

그의 손자가 채무일(蔡無逸·1496∼1556)이다. 조선시대 화가는 이른바 문인화가와 화원으로 대별된다. 문인화가는 사대부를, 화원은 속칭 환쟁이를 일컫고 있다.

문인화가도 조선시대 미감(美感)을 일정 부분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화가로 이름이 남는 것을 꺼려했다. 따라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각하도록 유언할 정도였다. 이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중국으로부터 남종화가 유입되면서 였다. 이들도 화단작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이후 등장한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심사정(沈師正) 등이 이런 부류에 속하는 문인화가들이다. 문인화의 화풍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인물은 김정희(金正喜)다.

채무일도 조선중기의 문신이면서도 인물과 풀벌레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전라도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중종이 사망했다. 1544년의 일이다. 그러자 그에게 어용을 그리게 하자는 주장이 대두됐다.

"듣건대 부안현감 채무일이 주서로 있을 때에 오랫동안 천안을 뵈었는데 위의 은혜를 크게 입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다고 늘 말한다 하니, 어용을 그리게 한다면 힘을 다할 것입니다."-<인종실록>

좌찬성 성세창(成世昌)의 건의였다. 그는 우리고장 김정(보은), 김수온(영동)과 친교가 깊었던 대신으로,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인물을 신원하는데 힘을 썼다. 성세창의 상소가 이어진다.

"또 눈동자는 내가 아니면 그릴 수 없다고 한다 하는데, 채무일은 그림을 잘 그릴 뿐더러 모든 일에 매우 정밀하므로 잘 살펴서 그림을 완성한다면 화공(畵工)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혹 그려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올라와서 함께 참여하도록 명하여 유감이 없게 하소서" 하니…'-<인종실록>

채수는 음성군 원남면 출신으로 우리고장 관찰사를 역임했다. 음성군 민속지와 전설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채수와 손자 채무일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다.

"손자는 밤마다 글을 읽지 않는구나(채수)" 하니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술을 몹시 드신다(채무일)"라고 답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개가 달아나니 매화가 떨어진다(채수)"라고 하니 "닭이 다니니 대나무잎이 되었도다(채무일)"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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