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처취처로 처벌받았으나, 청주목사 고태필

2012.01.03 16:35:43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이이(離異)의 사유가 됐다. 이이는 '헤어져서(離) 다르게 된다(異)'는 뜻으로, 이혼의 조선시대식 표현이다. 여자의 경우 저고리 섶을 잘라 남편에게 주는 것으로 이혼의 징표를 대신하기도 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아들을 못 낳는 것(無子) △행실이 음탕한 것(淫行) △질투하는 것(嫉妬) △나쁜 병이 있는 것(惡疾) △말이 많은 것(口舌) △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 칠거지악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장가들 때는 가난했지만 뒤에 부귀하게 되었거나 △아내가 돌아가서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등은 삼불거(三不去)라고 해서 남편은 부인을 버리면 안 됐다.

이 경우 이른바 유처취처(有妻娶妻)에 해당돼 처벌을 받았다. 이는 정실 부인이 있으면서 또 다른 정실 부인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전기 유처취처를 했다가 처벌을 받은 인물로 고태필(高台弼)이 있다.

해외인(海外人)인 그는 현감으로 있으면서 오늘날의 고시인 문과에 급제하고 또 좌익공신 2등에 책록되는 등 관료생활 초기에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사람은 '해외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유처취처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전 헌납(獻納) 고태필(高台弼)은 아내가 있는데도 아내를 얻고서 사칭하기를 전처를 망처(亡妻)라 하니, 사죄(私罪)로 장 90대를 집행하고 후처를 이이(離異)시키고 전처와 다시 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문종실록>

그가 왜 유처취처를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직장관계 때문에 떨어져 지냈고 그 과정에서 애정에 금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아내가 죽어서 새 장가를 들어야겠다"고 둘러댄 것은 너무 심한 것이었다.

'처음에 같은 고을 사람인 고준의 딸을 얻어서 아내로 삼았으나, 아내가 해도(海島)에 있고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함께 산 적이 없었다. 헌납을 제수하기에 이르러, 고신을 서경(署經)할 적에 아내가 죽었다고 하고서 뒤에 사족 김암(金巖)의 딸을 얻었는데, 본원에서 첫 아내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서 추핵하여 파직하였다.'-<〃>

고태필에게는 이때가 그의 관료 생활의 고비였다. 이후의 고태필은 모범적인 관료상을 보여준다. 제주도 진상품의 무거움을 과감하게 건의, 이를 개선한 인물이 고태필이었다. 인용문 중 앵무배는 조개껍질이 새의 부리처럼 생긴 것을 말한다.

초수리, 즉 지금의 초정약수를 찾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는 세종과 세조가 있다. 이와 관련, 세조 어가행렬 때 우리고장 청주목사로 재임하고 있던 인물이 고태필이었다.

세조실록은 '어가가 청주 초수(椒水)에 이르니, 목사 고태필·판관 곽득하가 어가를 맞이하였다'고 적었다. 이후 그는 충청도관찰사가 올린 포폄(褒貶·일종의 근무평가)에서 "승직할 만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충청도 관찰사 김진지가 글로써 아뢰기를, "청주 목사 고태필·온양 군사 이신효·임천 군사 박휘는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우며 상세하고 공명하여, 관리는 두려워하고 백성은 편안하니, 승직할 만하고…'-<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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