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시비 건립으로 본 신동문 산문세계

'나는 오늘이다, 고로 존재한다' 한때 실존주의 심취
남겨진 산문글, 詩만큼이나 감각적이고 심리묘사 탁월
바둑 글도 많이 남겨, 고 민병산·이승우씨와 자주 일합
평론가 김문수씨 "열병의 계단을 지나서 얻은 것이 詩"

2012.10.29 19:05:05

1960년 사진으로 맨 왼쪽이 고 신동문 시인이다. 박재삼, 김대규, 천상병, 김재섭, 박봉우 씨(왼쪽부터)의 얼굴도 보이고 있다.

사단법인 딩하돌하 문예원(이사장 박영수)이 31일 오후 문의면 문화재단지 내에서 고 신동문(辛東門·1928-1993) 시인의 시비를 건립한다.

이번에 건립되는 시비에는 그의 역작 중의 하나인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이 새겨진다. 이로써 신 시신의 시비는 단양읍 소금정공원('내 노동으로'), 청주 발산공원('풍선기1') 등 세 곳에 위치하게 됐다.

신 시인은 시 뿐만 아니라 산문 쪽에도 작품성이 뛰어난 수필을 많이 남겼다. 이번 세번째 시비 건립을 계기로 그의 산문 세계도 함께 살펴본다.

이날 건립되는 '아! 신화같은 다비데군들'에는 '내 흔드는 / 깃발은 / 쓰러진 전우의 / 피묻은 옷자락'이라는 시문장이 등장다.

이중 맨 마지막 단락은 읽는 순간 4.19 때의 거리 모습이 마치 옆에서 보고 있듯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감각적이면서 군더더기없는 표현이 돋보이고 있다.

생전의 신동문 시인 모습.

신시인은 천진한 성격에 정이 많았지만 심중을 밖으로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같은 심리 작동은 사랑하는 소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먼빛으로 오고 가는 나룻배에 이별의 온갖 곡절을 다 부여해 놓고 그녀에의 상념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쓴 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먼 물굽이 / 너 떠나고 난 뒤의 / 머언 물굽이 / 종일토록 오늘도 / 먼 물굽이.> 이런 따위의 시를 무수히 써서는 그 강물 위에 종이배를 만들어 띄우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산문집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324쪽>

신 시인은 풍부한 감성은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리한 감각으로도 치환됐다. 그의 등단(조선일조) 작품은 '풍선기'(풍선기)다. 이 시절 그의 감성이 공군 비행장 기압계 만큼이나 예민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전신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역사를 감각하고 나를 감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들에 반응한다. 의미로써 반응할 때 시가 되고, 현상으로써 반응할 때 행동이 된다. 이 끊임없는감응의 진폭이 나의 존재를 보증하고, 생명을 전진시킨다.'-<〃 13쪽>

그의 사유얼개가 감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철학적인 면도 물씬 풍기고 있다. 다음 산문은 그도 상당 기간동안 실존주의적 고민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존재하는 위치에 따라 회의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우리는 굳이 옛날의 누군가의 사상에만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늘에 있고 오늘에 산다. 차라리 이런 명제는 어떨까. 나는 오늘이다. 고로 존재한다.'-<〃44~45쪽>

신동문 마음의 여백 한 귀퉁이는 바둑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시골 바둑치고는 상당히 '쎈' (아마 4단) 편으로, 청주출신으로 관철동 디오게네스로 불렸던 민병산(閔丙山·1928~1988)과 일합을 자주 겨뤘다. 다음 글은 그가 심리 묘사에도 무척 탁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친구는 원래 신중파라 좀처럼 안 하던 실수를 어떻게 할라치면,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은 탄식을 내뱉는다. 그러곤 끙끙 앓으면서 회생책을 강구하느라고 기반(바둑판)에 구멍이 날 지경이다. 그것이 지루해서 나는 딴전을 피우고 있다가 역습을 당하고 아얏 소리도 못하고 패하고 만다.'-<〃107쪽>

그의 바둑에는 야성이 있었다. 그는 고을 원님에게는 대충 뒀지만 서울 한국기원을 찾았을 때는 상대를 두들기고 패주었다.

'전과 달리 승부에 관심이 없어 시들하던 중 마침 그 K(당시 단양군수 이승우씨의 오기)가 다른 곳으로 영전하는 바람에 그마저도 중단하고 말았다. (…) 그러나 한국기원에 들리면 나를 아무 때고 생각나면 잡아먹을 수 있는 오리(鴨)처럼 생각하는 자들을 가볍게 두들겨 패주는 것으로 내 아마 4단의 면장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곤 하는 것이다.-<〃 110쪽>

문학평론가 김문수 씨는 신동문 시인의 이런 젊었을 때의 산문을 '건물로 비유하면 청춘의 병든 계단'이라고 비유했다. 열병을 앓는 몸으로 계단을 올라 건물 안에서 얻은 것이 31일 세워지는 그의 시세계라는 의미다.

/ 조혁연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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