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립, 충주서 달려와 '성덕시'를 바치다

2014.02.27 18:44:22

조혁연대기자

한양도성을 출발한 세조의 어가는 사흘만에 우리고장 충청도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당시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이 세조 어가를 맞이했다.

'충청도 관찰사 신영손(辛永孫)이 어가를 맞이하고, 절제사 권언이 군사를 거느리고 결진(結陣)하였는데, 군대의 장비가 매우 성하였다. 임금이 우상대장 김질에게 명하여 용천산(湧川山)에서 몰이하게 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구경하였다.'-<세조실록 10년 2월 20일자>

세조실록은 신영손이 도계 어느 곳에서 세조의 어가를 영접했는지 기록해 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천 광혜원에서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조선시대 광혜원에는 충청도 신·구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인장을 주고 받는 교구정(交龜亭)이 존재했다.

당시 관찰사 인장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이것을 교환했기 때문에 그 장소를 '교구정'이라고 불렀다. 경상도 교구정은 한양애서 봤을 때 그 초입에 해당하는 문경새재 동쪽 사면에 위치했고, 지금도 현존한다.

세조의 어가가 좀더 남행(南行)을 해 진천 광석(廣石)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세조실록 10년 2월 20일자>

진천 광석이 어느 곳인지는 지명 추적이 잘 안 되고 있다. 반면 세종대왕은 20년전 초정약수를 방문했을 때 진천 북평천(北平川)이라는 곳에 머문 바가 있다.

조선시대 때는 임금이 거둥했을 때 그 앞에 나가 민원을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격쟁'(擊錚)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꽹과리를 친다'는 뜻으로,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꽹과리·북 등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했다.

세조가 진천을 지나갈 때 전관료인 충주사람 안자립(安自立·?-?)이 불쑥 어가 앞에 나타났다.

안자립이 늙어서 충주에 산다…(安自立老居忠州)는 표현이 보인다.

'검 호조 참의 안자립(安自立)이 늙어서 충주에 퇴거하였는데, 임금을 알현하고 술과 과일을 올렸다.'-<세조실록 10년 2월 20일자>

그러나 그가 세조의 어가 앞에 나타난 것은 격쟁이 아닌, 성덕시(聖德詩)를 바치기 위함이었다. 세조가 진천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충주로부터 달려온 안자립은 비교적 장문의 한시를 세조에게 바쳤다.

"동방에 참된 군주가 되시어 / 정난으로 창생을 구하시고 / 제명이 높게 돌보시니 / 간악한 무리들이 다투지 못하였도다. / 바른 부서는 여러 번 상서를 보이니 / 조야는 다시 태평하게 되었도다. / 몸소 조심하시어 무위로 다스리시니 / 빛나고 빛난 왕업이 이루어졌도다."-<세조실록 10년 2월 20일자>

그 뒤는 "대가가 남쪽으로 순수하시니 / 성스러운 법도가 정히 만전하도다. / 짐승을 사냥하여 종묘에 바쳐 올리고 / 양로연을 베풀어 늙은이를 공경하도다. / 재주를 시험하여 인재를 장려하고 / 농사일을 살펴서 환과를 편하게 하였도다. / 여염에서 봄빛을 즐기시고 / 다투어 성수가 하늘과 같기를 비나이다."(〃)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세조 재위 10년은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이 수양대군에게 죽은지 11년이 되는 해로 세조 정권이 안정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세조의 아들인 예종에게도 그의 나이 72세에 성덕시를 올린 것으로 실록에 기록돼 있다, 이쯤되면 그는 성덕시에 재미를 붙인 것이 된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