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유생과 창기들이 가요를 바치다

2014.03.11 15:31:56

조혁연대기자

1464년 2월 22일 초수리(초정약수)를 떠난 세조의 어가는 다음날인 23일 청주에 도착했다. 초정약수~청주는 한나절 거리로 그렇게 먼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걸린 것은 세조가 중도에 사냥놀이를 하고 천변에서 신하들과 작은 술자리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사(衛士)로 하여금 면령(免嶺)에서 몰이하게 하고, 어가를 천변에 머물러 작은 술자리를 베풀었다. 어서를 세자와 신숙주·홍윤성 등에게 내려서 이르기를, "내가 종훈 ·여러 장수와 더불어 적은 것을 베어서 나누어 마시는 것은…"'-<세조실록 10년 2월 22일>

세조가 청주에 도착하자 사장이 쌀을 바치고, 창기들은 가요를 부르며 흥을 돋웠다. '사장'은 조선조 때 사창의 곡식을 나누어 주고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맡아 보던 사람을 일컫는다.

'어가가 청주(淸州)에 이르렀는데, 사장(社長) 40여 인이 노상에서 향안(香案)을 베풀고 쌀 70말을 바쳤으며, 한 중이 목탁을 어가 앞에서 쳤으나 임금이 모두 다 이를 물리쳤다. 노인·유생(儒生)·창기(娼妓) 등이 가요(歌謠)를 바쳤다.'-<세조실록 10년 2월 23일>

청주의 노인, 유생, 창기들이 세조에게 가요를 바쳤다(선)는 내용이 보인다.

조선전기 청주목을 경유한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 모두 3명이다. 이 부분에서도 세 임금의 성격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세종은 자신 때문에 생업에 지장을 받는다고 생각, 주민들에게 음식 등을 자주 하사했다.

세종실록은 △'초수리 근방 농민 38호(戶)에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다'(세종실록 26년 3월 24일자) △'초수리 감고 박배양 등 8인에게 면포(綿布)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3월 29일자)라고 기록했다.

반면 태조 이성계가 청주목을 경유할 때는 베푸는 것이 아닌 야단법석스런 환영 잔치가 등장했다. 태조실록은 이 부분을 '청주에 이르니 목사 진여의(陳汝宜)와 판관 민도생(閔道生) 등이 나례(儺禮)를 갖추어 북교(北郊)에서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어가 앞에 절하였다'(태조실록 2년 2월 5일자)라고 적었다.

따라서 세조의 이날 청주거둥 모습을 굳이 비교한다면 세종보다는 태조의 모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조의 거둥에서는 세종과 비슷한 모습도 발견되는 일면이 있다. 세종은 진천에 사는 김덕숭이 지극한 효자라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술과 고기를 내렸다.

"이제 들으니, '본현 사람 전 한산군사 김덕숭의 부친이 나이가 95세이고 처모는 나이가 85세이며 덕숭의 나이도 70이 넘었는데, 한집안에 맞아서 두고 봉양하기를 심히 근실하게 한다.' 하니, 내가 그 효성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술과 고기를 주노니…."-<세종실록 26년 3월 13일자>

또한 세종은 김덕숭의 효행을 삼강행실(三綱行實)에 싣도록 했고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 정려는 지금 이월면 사곡리 사지 마을에 현존하고 있다있다. 세조에게서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그도 노인에게 의복을 하사했다.

'노인에게 주육을 하사하였다. 문원(文原)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나이 1백 4세이나 기력이 오히려 건장하므로 임금이 그 노인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포(脯)와 술 및 의복 한 벌을 하사하였다.'-<세조실록 10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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