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사'와 '법주사'는 별개 사찰일 가능성

2014.03.20 17:11:03

조혁연대기자

세조 어가는 1464년 2월 26일 청주를 출발하여 피반령(皮盤嶺·360m)을 넘어 회인에서 1박했다.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와 보은군 회인면 오동리를 남북으로 잇는 피반령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역사성이 오래 됐다.

세조 어가는 27일 보은 동평을 지나 병풍송에서 1박했다. 이때 복천암 주지 신미대사(信眉大師·1403-1479)가 영접나와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떡을 대접했다.

'거가가 보은현 동평(東平)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백 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세조실록 10년 2월 27일자>

세조 어가는 그 다음날(28일) 충청도 순행의 맨 남쪽 꼭지점인 속리산 중턱의 복천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속리사(俗離寺)를 경유하기도 했다.

'임금이 속리사에 행행하고, 또 복천사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 30구, 전지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에 행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1'결'은 대략 3천평 정도로, 이날 복천암이 세조로부터 받은 전토는 60만평이나 됐다.

위 인용문은 눈여겨 볼 부분이 더 있다. 복천사는 지금의 복천암, 속리사는 정황상 지금의 '법주사'를 지칭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된 '병풍송'의 별칭임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날 세조의 어가는 정이품송-법주사-복천암 순으로 이동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달리 봐야 할 개연성도 강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일부 문헌은 '속리사'와 '법주사'를 별개의 사찰로 표현한 경우가 적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속리사'와 '법주사'를 별개 사찰로 표현했다.

조선 중종 때 지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속리사 속리산 서쪽에 있다. 법주사 속리산에 있다'라고 기술, 속리사와 법주사를 별개의 사찰로 봤다.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도 마찬가지여서 '속리사가 산의 서쪽에 있다. 법주사가 산의 남쪽에 있다'라고 기술, 역시 서로 다른 사찰임을 분명히 했다.

앞서 언급한 인용문 중 뒷 부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조실록은 이날 세조의 어가가 '속리사, 복천사를 경유한 후 신시(申時)에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라고 기술했다.

예상과 달리 복천암에서 1박을 하지 않고 속리산 어딘가에 위치했던 '행궁'에서 숙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정황상 행궁은 병풍송, 즉 지금의 정이품송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천사 주지인 신미대사가 그곳으로 떡 1백 50동이를 해왔기 때문이다. 이 경우 세조는 정이품송 인근의 행궁에 머물면서 속리사, 복천암 순으로 방문한 것이 된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정이품송-법주사-복천암의 이동이 신시(申時·오후 3-5시)까지 걸릴 이유가 없다. 법주사에서 복천암까지는 7리밖에 되지 않는다.

속리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가 지적한 것처럼 속리산의 서쪽, 즉 지금의 산외면 신정리 방향에 존재했던 사찰일 가능성은 그래서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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