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향교에 들려 대뢰의식을 갖다

2014.03.25 18:46:05

조혁연대기자

청주향교는 5성과송조 6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5성은 공자, 맹자, 안자, 증자, 자사자, 송조 6현은 송나라 주자 등 6명을 말한다.

18현은 설총,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안유,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 김인후, 이황,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송시열, 김집, 박세채, 송준길 등이다.

청주향교는 역사적으로 10세기쯤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있다. 고려 성종은 즉위 2년(983)에 청주, 충주 등 전국에 12목을 설치했다.

"진실로 백성들의 희망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우서(虞書·요순시대 지칭)의 12목(牧) 제도를 본받아 지방관들을 설치하였노니, 주나라의 국운이 8백년간 계속 된 것처럼 우리나라의 국운이 장구할 것이다."-<고려사>

전문가들은 이때 청주, 충주 등 전국 12목에 향교도 함께 설치되면서 중앙에서 경학박사가 파견됐다고 밝히고 있다. 세종대왕은 초정약수에 행차를 할 때 청주향교에 여러 권의 서적을 내리기도 했다.

청주향교 대성전 모습.

이때 청주향교에 하사된 책은 통감절요, 통감훈의, 집성소학, 근사록, 통감강목, 성리군서, 사륜집 등 9권이었다.

세조의 어가는 1464년 2월 25일부터 23일까지 3일간 청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때 청주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세조실록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나 향교 대성전의 기록에 따르면 세조는 이때 청주향교를 방문, 문묘 제향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대뢰'(大牢) 의식을 갖기도 했다.

'우리 세조 충장대왕께서 본 고을에 어가를 머무시어 몸소 성인의 묘당에 제사를 하심에 대뢰를 쓰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법제를 이루었으니 해마다 희생에 쓸 소를 사서 먹이어 봄 가을에 배향을 지냈는데 호조가 '사치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희생소를 줄였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옛예법이 바뀌어 버리니 우리세조께서 제수우를 사용하여 남기신 뜻도 오늘부터 없어질 것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다.'-<청주향교 대성전 판액>

그리고 '어찌 소를 양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세조대왕의 남기신 뜻을 생각하시어 전부터 흘러내려온 예법을 생각하시어…'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결국 당시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고, 청주향교는 대뢰 제사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뢰는 나라 제사에 소를 통째로 제물로 바치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소는 보통의 소(牛)가 아닌, 집에서 기르던 소(牢)를 의미했다. 그래서 '牢' 자는 집을 의미하는 '갓머리변'에 '牛' 자의 결합으로 돼 있다.

정황상 청주향교는 세조의 방문 이후 대뢰의식을 치루는 것을 전통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대 이르러 농우(農牛)가 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잡는 제사를 제한하자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을 올린 인물은 '우방'이라는 유생이었다.

참고로 비슷한 뜻을 지닌 표현으로는 '희생양'(scapegoat)이 있다. 이는 제사 때 양을 속죄의 의미로 제단에 바치는 의식을 일컫던 말이다. 본래 희생되는 주인공은 '염소'였으나 1530년 성서를 영역한 윌리엄 틴들이 '양'으로 착각하면서 '희생양'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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